내가 서류에 서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나는 그동안 아무 서류나 쉽게 서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제 보니 문제는 내가 서명하지 않아도 누군가 내 이름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라슈가 가져온 종이에는 분명 ‘본인 확인: 레이븐’이라고 쓰여 있었다. 바깥에는 검은 잉크로 내 이름이 반복됐고, 가운데에는 별가루 지도 제작자에게만 주는 오래된 관측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그런 인장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르켄의 지도 제작자 등록증에는 작은 여우가 그려져 있었고, 내 가게 장부에는 손님들이 계산을 미루며 그린 웃는 얼굴이 잔뜩 있었다. 종이에 찍힌 것은 둘 다 아니었다.
“당신 이름이 확실합니까?” 켈반이 물었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 손으로 쓴 건 아닙니다.”
켈반은 원본 기록을 찾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바로 기계를 부수지 못하게 막았다. 자동 장치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 안에 남은 조작 흔적까지 지울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먼저 출력된 문서의 날짜와 금속판에서 신호가 발송된 시각을 따로 적었다.
미라가 종이를 들고 햇빛에 비췄다. 글자 아래에는 더 연한 압인 자국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내가 처음 별의 전당에서 쓴 출입 확인서와 대조했다. 획의 모양은 비슷했지만 끝부분이 조금 달랐다. 남의 필체를 흉내 낼 때 자주 생기는 차이였다. 그런데 마지막 ‘븐’의 아래쪽에는 오래된 내 지도통에서 본 것과 비슷한 작은 흠집이 있었다.
“너의 글씨를 베꼈을 수도 있고, 네가 쓰지 않은 오래된 글씨를 원본으로 삼았을 수도 있겠어.” 미라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두 해 전에 만들어진 지도통의 안쪽에서 내 손처럼 보이는 글씨가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때도 누가 그렸는지 확정하지 못했다. 지금 내 이름이 찍힌 문서와 그 지도통이 연결돼 있다면, 누군가 오래전부터 같은 방식을 써 왔다는 뜻일 수 있었다.
헤론은 출력 장치의 기록판을 조사했다. 켈반의 입회와 율다의 확인 아래 뒤쪽 덮개를 열자 작은 금속 원반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한 원반에는 ‘수신 미확인’, 다른 원반에는 ‘기본 처리 완료’가 새겨져 있었다. 이 두 가지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자동으로 결합됐다.
“기록이 비면 기본 처리 완료로 넘어가도록 만들었군.” 헤론이 중얼거렸다.
“누가 그런 짓을 했습니까?” 테온이 물었다.
켈반은 원반에 붙은 제조 표식을 보고 입술을 굳혔다. 백동상회가 납품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표식만으로 제조사 전체가 조작에 가담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기술자가 언제 끼운 원반인지, 납품 후 수정된 적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때 창밖에서 또 한 번 흰 안개가 올라왔다. 지대가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고원 아래의 깃발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율다는 손바닥을 세 번 펴서 신호했다. 외곽 세 구역에서 실제 수신자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금색 장치에는 그 구역의 주민들까지 이미 대피 완료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 이 종이에 속으면 바깥 사람들을 찾으러 가지 않겠군요.” 내가 말했다.
켈반은 원반을 내려다보다가 먼저 수동 작동 레버를 잡았다. “그럼 오늘은 이걸 쓰지 맙시다.”
“아예 경보도 보내지 않는 겁니까?”
“아뇨. 발신만 수동으로 남기고 수신은 따로 확인하죠.”
헤론이 수리도면을 가져와 회로를 나누는 방법을 설명했다. 금색 원반을 무조건 떼어 내면 기존의 진동 수신선도 끊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원반이 연결되는 곳에 임시 분리판을 넣고, 그 앞에서 켈반과 라슈가 각각 시험 신호를 보냈다. 율다는 진료소에서 깃발로 응답했다. 장치에는 ‘발신 있음, 수신 확인 대기’라는 두 줄이 따로 기록됐다.
나는 그 두 줄을 보고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계가 조금 덜 편리해진 대신 거짓말을 그만둔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발급된 서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켈반은 원본을 공개 보존함에 넣고 서명을 무효로 처리했다. 위조 여부와 작성자의 신원은 정식 조사를 남겼다. 테온은 사람들의 승인권을 왕실 문장 하나로 대신하지 않겠다고 다시 확인했다. 그의 옛 왕관 조각은 도장으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인의 형태를 대조하기 위해 사용됐다.
우리가 조사를 마칠 무렵 라슈의 아버지 바른이 힘겹게 관측대에 올라왔다. 그는 원본을 잠시 보더니 손을 뻗었다.
“이 표시를 어디서 봤는지 알 것 같아.”
바른은 ‘본인 확인’이라는 글자 아래의 작은 별 표식을 가리켰다. 종을 멈춘 밤 얼굴을 가린 관측자가 들고 있었던 지도통에도 이런 표식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지도통을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바른은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닮았어. 하지만 그때 본 건 이것보다 훨씬 짧았네.”
헤론이 길이를 재고 그림으로 비교했다. 우리는 같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바른이 실제로 기억한 모양과 내 지도통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조사할 이유는 생겼다.
“그 관측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물었다.
“영의 자리 아래쪽, 바닷냄새 나는 길로 내려갔지. 혼자는 아니었어. 서류통 든 사람도 함께 갔어.”
“그 사람이 에르안이었습니까?”
“모르네. 얼굴을 본 적 없어.”
나는 서둘러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바른이 기억을 꺼내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잘못 유도된 대답은 나중에 모든 것을 흐리게 할 수 있었다. 바른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종을 울린 뒤에 내려간 게 아니야. 종이 울려도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려간 거지.”
영의 자리에서 발견한 규칙과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왜 바닷길로 향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미라는 붉은 매듭과 파란 실이 섞인 천 조각을 꺼냈다. 바른은 매듭이 고원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서쪽 배들이 바닷길을 표시할 때 이런 색을 썼다고 했다. 미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녀에게 서둘러 누구의 흔적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 길까지 내려가 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오늘은 안 됩니다.” 율다가 대답했다. “계단이 무너졌고, 거기에는 어제 구조한 사람들도 다닐 수 없어요.”
미라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부터 고치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잠깐 웃었다. 우리는 모두 약간씩 비슷해지고 있었다. 나도 바다 냄새만 맡으면 배삯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다르게 남았다. 누군가의 흔적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지금 살아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같지 않았다.
그날 밤 내 지도통의 빈 페이지에 작은 검은 점이 찍혔다. 점 아래에는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지도 제작자 레이븐 — 영의 자리 귀환 서명 수신 완료]
나는 펜을 꺼내 그 아래에 또렷하게 썼다.
‘본인 서명하지 않음. 실제 귀환 확인되지 않음.’
검은 점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글자 옆에 빈칸 하나가 생겼다. 그 빈칸이 무서웠다. 누군가 내 이름을 빌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닫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의 예언이 다시 떠올랐다. ‘마지막 별이 떨어지는 날, 지도를 그린 자가 세계를 지운다.’
나는 그 문장을 지금 당장 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그것이 단순한 협박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사람을 지우는 일은 언제나 큰 폭발로 시작하지 않았다. 때로는 확인하지 않은 칸에 누군가의 이름을 넣는 것으로 시작됐다.
제12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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