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슈의 아버지 이름은 바른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옛날 종지기의 열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허리에 차고 다니던 것이라고 했다. 쇠에는 푸른 녹이 앉았고 손잡이는 손바닥 모양으로 닳아 있었다.
“이 열쇠가 관측대 문을 엽니까?” 내가 물었다.
“아니.” 바른은 웃었다. “그런 비싼 곳의 문은 내게 맡기지 않았지. 이건 종을 세는 창고 열쇠야.”
우리는 첫 문을 열기도 전에 환상 하나를 버렸다. 세상을 지우는 비밀이든 첫 관측자의 행방이든, 열쇠 하나 돌리면 밝혀지는 일은 없을 모양이었다.
바른은 종이 울리지 않게 된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에 빛줄기가 나타났고 관측대에서 세 명의 사람이 달려 내려왔다. 그들은 종줄 세 가닥을 풀어 서로 다른 지지대에 묶었다. 바른은 그것을 도왔지만 왜 해야 하는지 듣지 못했다고 했다. 소리가 사라지는 현상이 이미 시작돼 있었기 때문이다.
“셋이 누구였습니까?” 헤론이 물었다.
“한 명은 관측복을 입었고, 한 명은 서류통을 안고 있었지. 나머지는 얼굴을 천으로 가렸어. 내가 이름을 들은 사람은 없어.”
“그럼 돌아온 사람은 몇 명이었습니까?”
“그날 아침 창고 문 앞에 사람 넷의 발자국이 있었어.”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셋이 들어갔는데 넷이 나왔다는 말은 흥미로웠지만, 발자국 네 쌍을 네 사람의 귀환으로 읽는 순간 지난 수십 화 동안 배운 모든 것을 잊는 셈이었다.
“발자국이 모두 같은 시각 것이었나요?” 내가 물었다.
바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몰라. 나는 아침에 한꺼번에 봤을 뿐이야.”
나는 대답을 들은 만큼만 적었다. 그가 곧이어 보여 준 것은 창고 안쪽 벽에 새겨진 날짜였다. ‘첫 종 중단 — 18번째 황혼.’ 그 아래에는 당시 쓰던 오래된 달력의 기호가 있었다. 헤론은 그 기호를 보더니 장갑을 벗고 벽을 만졌다.
“루메르가 사라지기 전 관측 달력일세.”
테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우리 왕실의 황혼력과는 표기가 달라요.”
“그럴 수 있지. 왕실 달력과 항구 달력은 기준 해가 다르니까.”
테온은 왕실에서 배웠던 달력의 첫해를 설명했다. 헤론은 천문학자들이 사용하던 관측 주기와 비교했다. 둘은 같지 않았다. 그러나 벽의 날짜를 어느 쪽에 대입해도 공식 첫 낙성 기록보다 앞선 시기에 해당했다.
“그럼 낙성 전에 종을 멈춘 거예요?” 키오가 물었다.
“그렇다는 결론은 아직 빨라.” 헤론이 말했다. “벽이 언제 새겨졌는지, 달력이 실제로 같은 기간을 가리키는지부터 봐야 해.”
우리는 바른에게 허락받고 작은 탁본을 만들었다. 율다는 근처 석공이 남긴 보수 기록을 가져왔다. 창고 벽은 한 차례 수리됐는데, 날짜가 새겨진 돌은 그때도 교체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수리 기록에는 해당 돌에 난 작은 금의 방향까지 그려져 있었다. 오늘 그 금을 실제로 확인했다.
다만 그것이 날짜 자체가 오래됐다는 증명은 아니었다. 돌은 옛날 것이어도 문자는 나중에 새겼을 수 있었다. 헤론은 새김의 깊이와 표면에 쌓인 광물층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나는 그가 신중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조금 안도했다. 오래된 하늘 앞에서까지 그는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았다.
창고 안에는 더 이상한 물건도 있었다. 세 개의 종추를 하나로 묶어 놓은 쇠고리였다. 각 추에는 서로 다른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첫째는 눈의 모양, 둘째는 발자국, 셋째는 열린 손. 율다는 손으로 각각 ‘보았다’, ‘지나갔다’, ‘들었다’를 나타냈다. 그녀는 어릴 때 바른에게 배운 기호라고 했다.
“그 기호들이 ‘3’이라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세 종이 같은 말을 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율다가 적었다.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해야 했다는 뜻이죠.”
아르켄의 경계전이에서 우리는 가장 오래된 자리, 실제로 본 사람들의 기억, 스스로 선택한 통행을 서로 다른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때의 세 방향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다고 이 고리의 숫자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두 그림을 나란히 두고 아직 연결선을 긋지 않았다.
정오 무렵 관측대 관리소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이름은 켈반이라고 했다. 그는 회색 도포를 입고 금색 인장으로 봉한 서류를 내밀었다. 바른이 허락 없이 보관창고를 개방했으므로 모든 자료를 즉시 인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창고는 마을 재산입니다.” 율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도겐이 그 말을 천천히 옮겼다.
켈반은 인장만 보여 주었다. “관측대가 사용하는 종이므로 관리소가 보관권을 갖습니다.”
테온이 앞으로 나섰다. “루메르 왕실의 예전 허가 문구를 쓰셨군요.”
“왕자 전하께서 계시니 다행입니다. 확인 도장을 찍으시면…”
“그 왕실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건 바른 씨가 실제로 관리해 온 물건입니다. 먼저 주민들한테 물어야 합니다.”
켈반은 테온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그가 진짜 왕자인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예전의 테온이었다면 그 시선을 못 참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테온은 인장보다 창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먼저 확인했다.
“우리가 물건을 훔쳤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미라가 물었다.
“기록 열람 자체가 위반입니다.” 켈반이 답했다.
“그런데 왜 위반인지 설명은 안 하시네요.”
그는 우리를 노려보더니 창고 바깥의 경비병 둘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문 양쪽으로 섰다. 나는 순간 그들이 창고를 봉쇄할까 봐 걱정했지만, 켈반은 문을 닫지 않았다. 대신 내일 새벽까지 모든 자료의 사본 제출을 요구했다. 원본은 현장에 남겨도 되지만 조사 결과는 관측대의 공보로만 배포한다는 조건이었다.
“거짓 사본으로 사람을 위험하게 할 수 있잖습니까.” 내가 말했다.
“우리 관측대는 고원 전체의 안전을 책임집니다.”
“책임을 지려면 듣지 못한 사람을 들었다고 쓰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켈반은 그 말에 눈썹을 움직였다. 그는 그 표찰을 알고 있었다. 확인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전체 경고 완료’가 이미 중앙 장부에 입력됐으니 정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율다는 그 자리에서 종소리가 닿지 않는 집들의 명단을 적었다. 직접 방문한 가구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가구를 나누었다. 창고 앞에 모인 주민들은 한 사람씩 자신이 어떤 신호를 받았는지 설명했다. 누군가는 종을 봤고 누군가는 깃발을 봤으며, 누군가는 아무 신호도 받지 못했다. 켈반의 서류에 적힌 ‘전체’라는 말이 얼마나 거친 생략인지 드러났다.
켈반이 돌아간 뒤 바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소리가 사라진 게 문제였지. 그런데 나중에는 소리가 없어도 다 들었다고 적기 시작했어. 그때부터 사람들이 더 많이 다쳤다.”
그날 밤 나는 바른의 열쇠를 돌려주었다. 종 창고의 문은 여전히 열리고 닫혔고, 실제로 보관돼 있던 종추도 그대로 있었다. 지도에는 창고와 진료소 사이에서 우리가 걸은 길만 선으로 남았다. 공식 관측대까지의 길은 아직 누구의 발자국도 확인하지 못했다.
잠들기 직전 율다가 내게 작은 돌조각을 가져왔다. 종의 기호 셋이 새겨진 돌이었다. 뒷면에는 숫자 일곱 아래에 짧은 문장이 있었다.
‘일곱 번째 날, 세 번째 소리가 멎으면, 영의 자리를 비워 두라.’
미라가 자신의 반지 안쪽 `3·7·0`을 바라봤다. 우리는 처음으로 같은 숫자가 같은 순서로 쓰인 또 하나의 물건을 보았다. 그러나 그 돌을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제12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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