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너머의 남자가 자신은 에르안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나는 묘하게 안심했다. 적어도 그는 남의 이름을 빌려 자기 신분을 증명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안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가 서 있는 복도의 바닥이 또 한 번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는 정직한 말보다 튼튼한 바닥이 훨씬 드물었다.
“이쪽에서 열어 드릴 방법을 찾겠습니다!” 내가 외쳤다.
“여기서 여는 손잡이는 고장 났어.” 남자가 말했다. “왼쪽 배수로로 돌아가.”
모엘은 눈을 크게 떴다. “왼쪽 배수로는 막혔는데요.”
“막힌 건 지난 계절의 지도겠지.”
나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다른 날짜의 길을 알고 있는지는 당장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비용 구멍의 먼지 위에 새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도안에게 낡은 수문 기록과 오늘의 물길을 다시 재게 했다. 미라는 손가락으로 바닥의 경사를 짚으며 조수가 빠지는 시간을 기다렸다.
남자는 작은 틈을 통해 얇은 종이를 밀어 넣었다. 종이에는 ‘제2 하수문, 기계실 쪽에서 열림’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뒷면에는 연필로 그린 네모 세 개가 있었다. 모엘은 자기 정비일지와 비교했다. 두 네모는 실제로 존재했고 셋째는 옛 건물 도면에서만 보였다.
“셋째 문은 오늘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보지 못했으니 모르겠네.”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있었어.”
“그 답이 마음에 듭니다.”
“뭘 하려는 사람이야?”
“지도를 그립니다.”
남자가 짧게 웃었다. “그럼 남의 귀환을 함부로 완성하지는 말게.”
우리는 전당 바깥의 배수정을 돌아갔다. 테온과 키오가 밧줄 두 줄을 가져왔고, 모엘은 건물의 북쪽 버팀목 상태를 확인했다. 최근 누군가 부품을 갈아 끼운 탓에 문이 열리는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도안은 손잡이를 빼내며 투덜거렸다. “이런 건 수리라고 하지 않아요. 고장 위치를 옮기는 거죠.”
“그 말을 견적서에 꼭 적어 주게.” 내가 대답했다.
세 번째 정비구가 나타난 것은 물이 빠지기 시작한 뒤였다. 지하실 벽에서 오래된 배관이 드러나자 그 뒤에 발 한 사람 폭의 복도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지도에 선을 긋지 않았다. 모엘이 환기 상태를 확인하고 미라가 밧줄을 따라 먼저 왕복했다. 그녀는 돌아오며 말했다.
“가도 되는 곳은 여덟 걸음까지야. 그 뒤에는 돌이 깨져 있어.”
그제야 나는 여덟 걸음을 실선으로, 나머지를 미확인 표시로 그렸다. 남자는 그 좁은 복도의 반대편에 있었다. 얇은 판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했다. 그는 자신을 타린이라고 소개했다. 전당의 오래된 귀환 대조실에서 일하던 서류 운반인이었다.
“지금도 직원입니까?” 모엘이 물었다.
“일하러 들어왔다가 나갈 수 없게 됐으니 임금은 계속 받아야겠지.”
“다행이네요. 저보다 계산을 잘하시겠군요.” 내가 말했다.
타린은 웃지 못했다. 그가 여기 들어온 지 오늘 기준 사흘인지 일곱 날인지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전당의 남쪽 시계와 지하실 시계가 서로 다른 날짜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벽에 남긴 날짜표는 열한 개였지만 그중 셋은 같은 날을 가리켰다.
우리는 판자의 경첩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미라와 테온이 바깥에서 밧줄을 당기고 나는 도안이 손잡이를 빼내는 동안 지지대를 받쳤다. 바닥이 한번 크게 울려 모두 움찔했다. 헤론이 위에서 고함쳤다.
“물빛이 변한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아!”
“저도 물빛을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진흙뿐이에요!”
마지막 못이 빠지자 타린이 다리를 끌며 밖으로 나왔다. 발목에는 헝겊이 감겨 있었고 손에는 작은 금속 상자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자기 발로 여덟 걸음을 지나 미라가 확인한 길에 올라왔다. 중간에서 다리가 풀렸지만 테온이 부축해 바깥까지 끌어냈다. 모두가 지상에 오른 뒤 배수문이 다시 잠겼다.
타린은 물을 마신 뒤 자신이 어떻게 갇혔는지 설명했다. 왕실 대리 보존단을 자처한 사람들이 에르안의 귀환 기록을 원본과 대조해 달라고 했고, 그가 기록이 다르다고 말하자 전당 지하실의 보관함을 옮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했다. 지시대로 내려간 뒤 문이 닫혔다. 일부러 가뒀는지 기계 고장이었는지는 그도 직접 보지 못했다. 다만 그가 들은 마지막 명령은 ‘오른쪽 사본을 우선 보존하라’였다고 했다.
“에르안은 돌아왔습니까?” 키오가 물었다.
타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야. 나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문을 통과하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는 손의 금속 상자를 열어 보였다. 안에는 완성된 지도 대신 얇은 봉인 종이들이 있었다. 한 장은 에르안 관측 중단의 원안 표지, 다른 하나는 루카스가 자료를 인계받았다는 확인, 마지막은 서명란이 비어 있는 귀환 증명서였다. 그런데 누군가 세 장을 겹쳐 보관하도록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어 두었다.
“구멍을 통해 한 번에 도장을 찍으면 세 장에 같은 표시가 남겠군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같은 귀환 사건처럼 보이겠지.” 테온이 답했다.
타린은 서류를 본래 보관 위치로 돌려놓겠다고 했지만 모엘은 먼저 그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루시엔이 흰 별 계단에서 보낸 응급 처치 가방이 배에 남아 있었다. 미라가 붕대를 가져와 타린의 발목을 감았다. 그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으나 미라는 빚을 갚을 때가 아니라며 쉬라고 했다.
그날 늦게 페르딘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타린을 보자 놀랐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발급받은 사본에 문제가 없으며, 원본까지 확인하려면 왕실 후계자의 공식 입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테온은 자기 이름으로 타인의 귀환을 확정할 수 없다고 다시 거절했다.
“그럼 보존단의 사업이 지연됩니다.” 페르딘이 말했다.
“사업이 늦는 것과 사람이 사라지는 건 다른 일입니다.” 테온은 대답했다.
우리는 타린의 서류를 각각 따로 보관하기로 했다. 원본은 모엘의 입회 아래 봉인했고, 탁본을 이설과 아린에게 보내 재대조를 요청했다. 무엇을 확인했는지도 모두 적었다. 에르안의 귀환은 미확정, 루카스의 자료 인수는 확인, 타린의 현장 구조는 당사자가 직접 확인했다.
밤이 깊자 타린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대들이 정말 찾는 것이 귀환자라면, 왜 내 이름을 들었을 때 반기지 않았지?”
나는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했다. “반가웠습니다. 다만 당신을 찾아온 목적과 당신이 살아서 돌아온 사실을 같은 사건으로 합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래된 봉인 종이 뒤쪽에 적힌 작은 문장을 보여 주었다.
‘별의 전당 제3 층. 직접 돌아온 자가 아니라 돌아오지 않은 자의 자리를 기록할 것.’
그 아래에는 서명이 아니라 좁은 삼각형의 흠집이 있었다. 내 지도통 속 작은 홈과 비슷한 방향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두 흔적을 그대로 겹치지 않았다. 각각 다른 종이에 옮겨 그려 놓았다. 누군가 일부러 우리가 두 개를 하나로 믿게 하려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한 번, 또 한 번. 이번에는 모엘이 직접 친 저녁 점검종이었다. 오늘 전당에서 확실히 돌아온 사람은 타린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만은 누구의 서명도 빌릴 필요가 없었다.
제10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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