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식이 심사에 제출한 첫 번째 물건은 낡은 필름의 사진이 아니었다. 인쇄소에서 오랫동안 쓰던 작업일지였다.
'5월 11일, 상담 처리표 제0항 시안 교정.'
'5월 12일, 보류 항목 인쇄 보류.'
'5월 14일, 최종본 재검토 요청.'
해마다 숫자와 거래처 이름이 적힌 수첩. 다른 날짜의 잉크와 필체가 뒤섞여 있어 특정 사건을 위해 새로 만든 기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증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훈은 구은정이 준비한 비교 표를 보았다. 보관 시스템이 말하는 첫 번째 거절일은 5월 14일이었다. 인쇄소의 기록에는 그보다 사흘 앞선 5월 11일부터 이미 실행 중단을 요구하는 문장이 있었다.
"혹시 날짜를 잘못 쓴 것 아닙니까?"
검토위원이 물었다.
태식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으니 확인하셔야죠. 대신 그 옆에 봄축제 안내문 인쇄 기록이 있어요. 그 행사 날짜는 공개 포스터와 맞습니다."
예린이 포스터 접수증을 대조했다. 날짜는 일치했다. 변조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작업일지가 당시 일상적인 업무에서 쓰였다는 근거가 됐다.
"저 문장을 쓰던 날 기억나십니까?"
혜숙이 물었다.
"기억은 좀 흐려요. 종이가 기억하겠죠."
태식은 돋보기를 꺼내 필름 가장자리의 작은 흠집을 보여 줬다. 나중에 만든 복사 필름에는 없는 자국이었다. 그 자국은 작업일지에 적힌 '재출력 금지, 필름 수정' 메모와 맞아떨어졌다.
"그 자국 때문에 그때 한 장을 더 뽑아야 했어요. 종이를 아끼려다가 두 장을 버렸지."
태식은 그 일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했지만, 지훈은 태식의 기억을 서류와 같은 증거로 취급하지 않았다. 과거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달라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필름과 작업일지, 접수증을 따로 남겼다. 서로 다른 자료가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지 검토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훈은 처음으로 자료가 서로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았다. 어떤 사람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다른 곳에 남겨 놓은 기록들이 조심스럽게 연결되고 있었다.
한편 공석관리재단 측에서는 해당 시안이 실행 전 문서일 뿐 실제 계약 거절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구은정은 그 주장 가운데 맞는 부분을 인정했다.
"실제 계약이 성립했는지는 다른 자료가 필요합니다. 다만 혜숙 씨가 당시 제안된 처리 방식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는 사실을 '존재하지 않음'으로 분류할 수는 없습니다."
위원은 두 문제를 별도로 적었다.
'과거 계약의 효력: 추가 확인.'
'과거 반대 의사 표현의 존재: 자료 다수로 뒷받침.'
철민은 종이를 보고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작은 차이인데 크네요."
"사람 인생에는 그런 차이가 크죠."
지훈이 말했다.
심사가 끝난 뒤 혜숙은 오래된 인쇄소로 다시 향했다. 지훈이 동행하겠다고 하자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요. 그다음은 기다릴 겁니다. 기다리는 것도 제 선택입니다."
지훈은 그녀를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그날 저녁 새로운 상담 예약이 들어왔다. 발신자는 예전에 보류를 동의로 처리당했던 구직자와 같은 이름이었다. 지훈은 놀라서 전화기를 들었지만, 먼저 본인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문자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제 사건을 대신 설명하지 말아 주세요. 상담은 받고 싶습니다. 제 이름은 비공개로 해 주세요.'
지훈은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도 직접 정하실 수 있습니다.'
기록실의 문제를 조사하는 동안에도 새 출발 소개소의 문을 찾는 사람은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과거에 누가 옳았는지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내일을 어떻게 살지 이야기할 자리를 얻는 일이었다.
제8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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