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솔은 화요일에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화분을 창가로 옮겼다. 바질 잎은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엄마 윤미정이 밥을 차리는 동안 솔은 줄기 사이에 새 잎이 돋았는지 살폈다.
"오늘은 숫자 안 보였어?"
미정의 질문에 솔은 고개를 저었다.
"응. 가끔 회색 글씨만 지나가. 근데 그게 누군가에 관한 건지 모르겠어."
"억지로 보려고 하지 않아도 돼."
"알아. 지금은 식물만 보고 싶어."
같은 날 오지훈은 구은정에게서 한 가지 문서를 받았다. 1차 반환안의 초안이었다.
'관찰 권한: 원천 승인권자로 재귀속.'
'청취 권한: 원천 승인권자로 재귀속.'
그 아래에는 이름이 가려져 있었다.
"원천 승인권자가 누굽니까?"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권한을 가지길 원하는지도 묻지 않았다는 거예요."
예린의 대답에 철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사람한테 붙어 있던 걸 떼어 내서 처음 사람한테 붙이면, 그게 해결 아닙니까?"
"어쩌면 그 사람도 싫을 수 있어요."
지훈이 말했다.
"저한테 돌려준다고 해도 싫습니다. 남이 생각하는 직업을 멋대로 들여다보는 눈은 필요 없어요."
철민은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는 빵을 만든 첫날이 떠올랐다. 누군가 '당신이 타고난 직업은 제빵사'라고 외쳐 주는 것보다 자신이 반죽을 만져 보고 좋아했던 순간이 더 중요했다.
지훈은 솔과 한시온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는 폴더를 닫았다. 두 미성년자에게 반환 실험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보호자에게는 검토 중인 절차가 있다는 사실과 문의 창구만 안내했다. 구체적인 실험 시각도, 능력 사용 요청도 보내지 않았다.
그날 오후 박이안이 소개소에 들렀다. 그는 서다경에게 배웠던 수리 작업으로 첫 유상 의뢰를 끝냈다고 했다. 지훈은 영수증을 보며 축하했다.
"그럼 이제 기술 양도 계약 같은 건 필요 없겠네요."
"안 필요하죠. 근데 처음엔 잘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뭐든 사고 싶었어요."
이안이 드라이버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 달만 지나도 제가 직접 익힌 게 남더라고요. 그거면 됐어요."
그 말을 듣고 지훈은 반환안 옆에 질문을 적었다.
'원래 주인이 원하지 않는 능력을 돌려받아야 하는가?'
이안이 돌아간 뒤 철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전에는 제빵이 적성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만으로 제가 누군지 알겠더라고요. 지금은 그 숫자가 없어도 좋습니다. 박 사장님이 빵을 팔아 보고 다음 날 다시 만들자고 하면, 그때 제 일 같아요."
"그럼 적성을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빵 굽는 건 누가 뺏어 갈 수 없으니까요. 대신 제가 싫어지면 그만둘 수는 있어야죠."
지훈은 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철민이 빵을 계속 굽겠다는 마음보다, 언젠가 그만둘 수도 있다는 말을 직접 하게 된 것이 더 큰 변화였다.
저녁에는 혜숙에게서 메일이 왔다. 혜숙은 문의 기록이 승인으로 변한 경위를 조사해 달라는 요청에 서명하겠다고 했다. 다만 권한을 수령하거나 원천 승인권자가 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별도의 문장으로 밝혔다.
지훈은 회신했다.
'그 두 문장을 별도로 보존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보관 담당 부서에서 수정 공문이 도착했다. '반환'은 기능을 반드시 누군가에게 넘기는 과정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일정한 조건에서는 미배정 상태로 분리 보관할 수 있었다.
예린이 표시한 문장을 읽자 지훈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선택 가능한 처리: 재귀속 / 분리 보관]
그러나 바로 아래에 또 다른 조건이 있었다.
[분리 보관 승인 요건: 최초 거절자의 유효한 의사 표시]
지훈은 혜숙의 메일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시스템은 그 말을 유효한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제8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