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출발 직업소개소에서는 '보류'라는 말이 흔했다.
면접을 볼지 말지 하루 더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취업보다 치료가 먼저인 사람도 있었다. 지훈은 상담표에 보류라고 쓰면 그 뒤 칸을 비워 뒀다. 빈칸을 미완료 업무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그의 작은 규칙이었다.
그런데 예린이 가져온 원본 기록실의 처리 표는 달랐다.
[신청 → 배정]
[보류 → 임시 배정]
[거절 → 사유 재검토]
"보류가 임시 배정이라는 건 처음부터 사람을 올려놓는다는 뜻이잖아요."
철민이 말했다.
"설계가 그렇다는 건 맞아요. 실제로 언제부터 적용됐는지는 더 봐야 해요."
예린은 교정 시안의 날짜와 재단에서 받은 처리 매뉴얼의 개정 이력을 대조했다. 원래 시안에는 각 선택마다 화살표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개정본에서는 세 화살표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상담 지속.'
"멈추라는 뜻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친 거네요."
지훈이 중얼거렸다.
그날 방문한 상담자는 이혼 후 다시 일을 시작하려는 김도연이었다. 도연은 전산 회계 일을 해 봤지만 올해는 일주일에 사흘만 근무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훈이 구인 공고 두 개를 보여 주자, 그녀는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는 월급이 높네요. 하지만 야근이 많을 것 같아서 고민돼요."
"결정은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오늘은 조건을 확인할까요?"
"보류하면 기회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지훈은 잠시 눈길을 들었다. 참 많은 사람이 보류라는 말에 죄책감을 느꼈다.
"공고 자체는 마감될 수 있어요. 그건 사실대로 말씀드려야죠. 하지만 보류했다고 해서 다른 일자리로 자동 지원되지는 않습니다."
도연은 그제야 어깨를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력서에서 '항시 근무 가능'이라고 적힌 오래된 문장을 지웠다. 그 문장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울까 봐 예전에 스스로 써 놓은 말이었다.
"이걸 지우면 불리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지우지 않으면 일을 시작한 뒤에 더 곤란할 수 있어요. 결정은 도연 씨가 하세요."
도연은 두 공고 중 하나에 별표를 하고, 지원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상담이 끝난 뒤 혜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래전 기록에 남았던 병간호 중인 구직자가 아직 살아 있다고 했다. 혜숙은 연락처를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이 과거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확인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제가 대신 증언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그게 맞습니다."
지훈은 전화기 옆에 '동의 없는 과거 사건 공개 금지'라고 적었다.
오후 네 시, 구은정이 원본 기록실의 열람 기준에 대한 정식 답변을 가져왔다. 담당 부서는 '본인의 거절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제한적으로 접근 권한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단, 접근 전 '권한 복원 절차에 참여한다'는 확인서를 내야 했다.
"그 확인서는 무엇을 뜻합니까?"
지훈이 물었다.
"저희도 묻고 있어요. 열람만 하려는 사람에게 왜 권한 복원 참여를 요구하는지 근거가 없습니다."
구은정은 문서의 뒷면을 펼쳤다. 거기에 작은 글씨로 이런 조항이 있었다.
'정당한 사유 없는 절차 중단 시 기존 배정 상태로 복귀할 수 있음.'
지훈은 그 조항에 형광펜을 그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다시 제자리로 끌어오는 문장이었다.
"이 서류에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자료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랑 권한을 되찾겠다는 마음은 다르니까요."
예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원본을 못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 있어요. 대신 다른 경로를 찾죠."
구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절차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혜숙 씨가 직접 작성한 시안과 문의 기록은 별도로 보존해 두고요."
밤에 예린은 인쇄소 필름에서 보이지 않던 글자를 발견했다. 필름 아래를 비스듬히 비추니 작은 교정 기호가 드러났다.
'동의하지 않은 입력은 보관하되 실행하지 않는다.'
그 문장은 어느 열 칸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처음부터 중요하다고 적어 놓은 규칙만, 시스템이 정식 기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제8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