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이 일하던 인쇄소는 지하철역 뒤편에 있었다. 간판은 바래 있었지만 출입문 옆 작은 종소리는 선명했다.
"이제는 동네 행사 안내문하고 졸업 작품집만 찍어요."
인쇄소를 지키는 윤태식이 말했다. 칠십을 앞둔 그는 혜숙보다 먼저 근무했던 인쇄 기술자였다. 지훈이 봉투를 꺼내자 태식은 내용보다 용지의 끝을 먼저 만져 보았다.
"이 종이, 우리 집에서 쓰던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선은 본 적 있어요."
그는 서랍에서 오래된 판형 견본을 꺼냈다. 가로로 가느다란 선 열 개가 있는 시안이었다. 그 아래에는 '000번 상담 처리 원칙'이라고 적혀 있었다.
혜숙이 의자를 당겼다.
"처음에는 직업 소개 업무를 표준화하자는 의도였어요. 상담하러 온 사람을 무단으로 취업 처리하지 못하도록, 거절을 남기려 했지요."
"그 원칙을 왜 열 칸으로 나눴습니까?"
예린의 질문에 혜숙은 잠시 생각했다.
"우리는 열 칸을 만들지 않았어요. 첫 시안에는 세 칸뿐이었어요. 신청, 보류, 거절."
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꺼낸 시안에도 정확히 세 칸이 인쇄돼 있었다. 나중에 붙은 열 칸은 원본 시안과 종이 질감이 달랐다.
지훈이 물었다.
"그럼 누가 열 칸으로 바꿨다는 겁니까?"
"그건 아직 몰라요. 원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뜻만 확실하죠."
혜숙의 대답은 간단했다. 지훈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채워 넣지 않았다.
태식은 작은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 안에는 폐업한 업체의 견본과 종이 샘플이 날짜순으로 보관돼 있었다. 그는 그중 노란 봉투 한 개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상담 절차 개선 시안 / 교정 전.'
표지 안쪽에는 손글씨가 남아 있었다.
'보류를 동의로 처리하지 말 것. 오혜숙.'
"제가 쓴 글씨예요."
혜숙이 조용히 말했다.
"그때 어떤 분이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시스템에는 '취업 의사 있음'으로 넘어갔거든요. 그 사람은 아이 병간호를 하고 있었어요. 기다릴 수 없다는 이유로 직장에 이름이 올라갔지요."
"그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단결근으로 적혔어요. 그 뒤에 정정하느라 오래 걸렸습니다."
지훈은 서류 모서리를 살폈다. 교정 시안에 적힌 메모는 제삼자가 작성한 증언이 아니라, 혜숙이 그 당시에 한 문제 제기였다. 다만 이것만으로 원본 기록실이 그녀의 거절을 지웠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예린은 태식의 허락을 받고 문서 앞뒤를 촬영했다. 원본은 가져가지 않았다. 누가 어떤 시기에 보관해 왔는지도 태식에게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태식은 오래된 전표에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촬영한 문서와 필름이 서로 같은 것이라는 확인 문구도 남겼다. 예린이 원본을 스캔해 가져가자고 제안했을 때 태식은 잠깐 망설였다.
"이 종이는 여기서 여러 해를 버텼어요. 단 하루 만에 남의 손에 넘어가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럼 저희는 사본만 갖겠습니다. 필요할 때 원본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서로 허락한 범위가 정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철민이 아래층 빵집에서 싸 온 단팥빵을 꺼냈다. 태식은 빵을 한입 먹고 웃었다.
"이 집 반죽이 좋네. 누가 했어?"
"제가 했습니다."
"손이 험하게 생겼는데 섬세하구먼."
철민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웃었다.
"예전에는 손이 험한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식은 아무것도 더 묻지 않았다. 빵맛 이야기로 대화를 돌렸고, 철민은 그 배려가 고마웠다.
나오는 길에 혜숙이 지훈을 불렀다.
"제 이름을 증명하는 게 목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때 보류를 요청한 사람의 이름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요."
"알겠습니다. 그분이 원하지 않으면 그 기록을 밖으로 꺼내지도 않을게요."
지훈이 대답하자 혜숙은 캐비닛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것만은 봐야겠군요."
캐비닛 맨 뒤에는 출력이 한 번도 되지 않은 투명 필름이 남아 있었다. 필름 상단의 날짜는 보관 목록에서 알려 준 '최초 거절일'보다 사흘 빨랐다.
그 아래에는 새 문장이 있었다.
'제0항. 답이 없으면 절차를 멈춘다.'
제8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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