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에는 발신 번호 대신 '원천관리계정'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었다. 오지훈은 종이를 사진으로 남기고 출력된 시각을 적었다. 재단이 한시온과 자신을 시험 관계자로 적었다고 해서 실제 시험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 이름이 왜 여기 있죠?"
나예린이 물었다.
"어제 세탁소 관련 문의에서 보호자 연락처를 적었잖아요. 그 정보가 넘어갔다면 큰 문제예요. 하지만 같은 이름을 알아냈다는 것만으로 유출 경로를 단정할 순 없어요."
지훈은 한정미에게 팩스의 존재를 설명했다. 원본 사진은 보내지 않았다. 그 안에는 정미가 알아야 할 내용 외에도 다른 자료가 붙어 있었다. 정미는 아들과 함께 그날의 방문에 관해 설명할 것인지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쪽에서 연락이 오면 아이가 응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 문서는 저희가 동의한 적 없는 시험 통지예요. 대답하거나 참석할 의무가 있다고 볼 근거가 없습니다."
정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시온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럼 아저씨도 시험 안 가는 거예요?"
"네. 나도 안 가려고."
"어른도 안 가도 돼요?"
"그렇지. 누구든지."
통화가 끝난 뒤 예린은 자신의 장비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 발급 경로를 따졌다. 팩스 표지는 과거 소개소에서 사용하던 기본 서식을 흉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수신 기록에는 외부 전송 번호가 남아 있었다. 재단이 예전에 빌려 썼던 문서 발급 대행 서비스와 연결되는 번호였다.
"소개소로 보낸 문서인데 접수 번호가 우리 쪽처럼 보이게 되어 있어요. 허위 접수 기록을 만들려고 한 걸 수도 있어요."
"그럼 제 이름으로 시험 신청을 했다는 말입니까?"
"그걸 확인해야죠."
지훈은 거래소의 신청 내역을 조회하기 위해 자신의 계정에 로그인했다. 신청서를 열자 '참여 동의' 옆에 체크 표시가 있었다. 서명 시각은 오늘 오전 열 시 사십일 분. 그는 그 시각 도서관에 있었다.
"이건 제가 누르지 않았어요."
"그러면 수정하거나 삭제하지 말고 증거로 남겨요."
예린은 화면을 기록했고, 지훈은 운영사에 이의를 제출했다. 구은정은 기록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도록 서버 접속 자료의 보전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절차를 거친 뒤 제출된 이의 신청서에는 단 한 줄이 강조돼 있었다.
'신청자 본인 의사 확인 기록 없음.'
그날 저녁, 시온의 아버지 한재욱은 과거 세탁소 프로그램에 로그인했던 자신의 오래된 태블릿을 찾았다. 기기에는 세탁소 직원들의 실명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프로그램 사용 기록은 남아 있었다.
'공석 유지 중단 요청: 접수 실패.'
날짜는 세 해 전. 한재욱은 그 기록을 보자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도 그만하겠다고 눌렀군요. 제가 잊었지."
정미가 물었다.
"그러면 당신이 취소를 안 한 게 아니라 취소가 안 된 거네?"
"그럴 가능성이 있지. 확실히 따져 봐야겠어."
지훈은 재욱이 직접 화면을 확인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문의하도록 도왔다. 그날의 성과는 거창하지 않았다. 한시온의 이름을 비공개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 접수됐고, 두 사람의 신청 건에 이의 표시가 붙었다.
그러나 밤 열한 시, 거래소의 공개 행사 화면에는 좌석이 두 개 남아 있었다.
'청취자 1석 / 원천 제공자 1석.'
이름은 가려졌지만, 자리는 그대로였다.
예린이 말했다.
"당사자 이름을 지워도 시험은 진행하겠다는 모양이에요."
지훈은 의자를 바라봤다. 예전에는 빈자리를 누군가의 몸으로 채우려 했다. 이제는 이름을 지우고서라도 자리를 팔려 하고 있었다.
제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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