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계약서를 한참 바라봤다.
"서명이 제 글씨와 닮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서명한 적은 없어요."
정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도 이상했습니다. 회장님이 '언젠가 올 사람의 자리'라고만 했거든요."
"그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철민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태식이 눈을 내리깔았다.
"겁났으니까요. 그게 변명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철민은 대꾸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겁이 무엇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지훈은 그 사이에 공책을 돌려줬다.
"혹시 복사해 둬도 됩니까? 이 번호와 날짜는 나중에 확인할 가치가 있어요."
"그 부분만요. 딸 관련 기록은 빼 주세요."
지훈은 요청한 부분만 사진으로 남겼다.
오후 세 시, 소개소에서 첫 번째 구직자 모임이 열렸다. 참석자는 지훈, 철민, 예린, 김지연, 정태식, 그리고 지연이 데려온 두 사람이었다. 다른 세 사람은 오고 싶어 했지만 신분 노출이 걱정돼 참석하지 않았다. 지훈은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새로 온 사람 중 한 명은 택배 분류장 야간반에서 일한 백승오였다. 그는 예전에 자전거를 만들고 고치는 일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브레이크 선 하나 갈아 끼우려 해도 온몸에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오래된 식당에서 일했던 한미숙이었다. 미숙은 요리를 잘했지만 미래인력개발에 들어간 뒤로는 조리기구를 만질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집밥을 해 주고 싶다는 마음만 남았다고 했다.
지훈은 참석자들에게 빈 종이를 한 장씩 건넸다.
"여기에 이전 직업을 쓰셔도 좋고,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에요. 앞으로 해 보고 싶은 일 한 가지를 적어 주세요."
승오는 '자전거 정비'라고 적었다. 미숙은 한참 망설이다 '아이들 밥'이라고 썼다. 지연은 '딸 점퍼 소매 수선'이라고 썼다. 예린은 칸을 비워 두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빈칸도 선택입니다."
지훈이 답했다.
그런데 철민의 종이에는 '빵' 대신 길게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븐 앞에 서서 오늘 내 손으로 만든 걸 누군가에게 팔고 싶습니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건 적성보다 훨씬 구체적이네요."
"제가 말이 좀 많아졌습니다."
모임은 화기애애했지만 문제는 금방 나타났다. 누가 돈을 받았는지, 회사에 어떤 서류를 냈는지 이야기하자 서로의 기억이 엇갈렸다. 같은 종류의 계약서를 봤다고 생각했지만 각자 받은 문구는 달랐다. 한 사람은 장례비를, 다른 사람은 교육비를, 또 다른 사람은 입사 축하금을 받았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그 돈을 돌려줄 수 없게 되는 별도의 계산이 따라붙었다는 점이었다.
태식이 칠판에 세 단어를 적었다.
'서명. 대가. 확인.'
"저는 이것들이 잠금을 유지한다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았어요."
예린이 덧붙였다.
"그래서 앞으로 누구도 실험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겁니다. '이 말 하면 능력 돌아온다' 같은 소문도 퍼뜨리지 마세요. 잘못되면 더 위험합니다."
승오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뭘 할 수 있습니까?"
"일을 구하려고 온 이유를 계속 기록할 수는 있어요. 실제 근무 내역과 계약 자료를 보관하고요. 혼자 위험한 회사로 돌아가지는 않도록 서로 연락망을 만들 수도 있고요."
미숙이 두 손을 모았다.
"그럼 이곳이 우리 회사가 되는 겁니까?"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회사가 아니라 모임이에요. 여기서 나가고 싶으시면 나가셔도 됩니다. 회비도 없고, 개인 사정을 다 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미숙은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이상하네요. 어디 들어갈 때부터 나가도 된다고 말해 주는 곳은 처음이에요."
지훈은 웃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그날의 첫 모임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누군가는 겨우 이름만 말했고, 누군가는 말을 하다 울었다. 지훈은 그들에게 다 나을 거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실습처를 찾아보고, 계약 자료를 정리하고, 상담기관에 연결해 보겠다는 약속만 했다.
모임이 끝나갈 때, 박 씨가 빵을 한 상자 들고 올라왔다.
"장사 끝나고 남은 겁니다. 꼭 남은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러나 철민은 박 씨가 일부러 새로 구운 빵을 넣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특유의 따뜻한 냄새 때문이었다.
철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다음번엔 제가 구워도 됩니까?"
"손이 돌아오면. 그전엔 천천히 해요."
박 씨는 그 말을 자연스럽게 건넸다.
모두 돌아간 뒤 지훈은 출입문을 잠그고 매트를 정리했다. 예린은 오늘 참석한 사람들의 연락처를 본인 동의 범위에 맞춰 따로 저장했다. 이름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별칭으로 기록했다.
"이렇게 하면 백도식이 우리가 뭘 하는지 알기 어려워지겠죠?"
"조금은요. 그러나 그 사람은 벌써 인원을 세고 있어요."
예린이 창밖을 가리켰다.
길 건너편 전봇대에 새로운 채용 광고가 붙어 있었다. 어제와 같은 디자인이었다. 다만 맨 아래 문장이 달라졌다.
'미래인력개발 이직자 전원 재상담 실시. 불참 시 경력 무효.'
지훈은 광고를 촬영했다. 철민이 떼러 가려 했지만 지훈이 먼저 말했다.
"잠깐. 증거부터 남기고 신고합시다."
철민은 손을 내렸다.
바로 그때 건물 전체의 전등이 꺼졌다. 정전이었다. 아래층 빵집 오븐도 멈췄다. 밖의 가로등은 그대로 켜져 있었다.
예린의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모임이 참 보기 좋더군. 하지만 가게를 지킬 재능도 있나?'
발신자는 백도식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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