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서다경은 작은 공책을 들고 소개소 문을 열었다.
첫 장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맡았던 공연장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두 번째 장에는 고장이 났을 때 확인해야 할 순서가 적혀 있었고, 세 번째 장에는 젊은 날 자신에게 일하는 법을 가르쳐 준 선배의 이름이 있었다.
"내가 아는 건 아직 여기 있더군요. 손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박이안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적힌 카드와 미사용 체험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반납했다고 뜨는데 왜 다른 사람 추천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게 우리가 확인하려는 겁니다."
예린은 밤새 확인한 자료를 펼쳤다. 미래재능거래소는 정식 법인명과 온라인 서비스명이 달랐다. 공개 등록 자료의 대표자는 실제 사람으로 확인됐지만, 서비스 화면에는 '원천관리계정'이 운영 주체처럼 표시되어 있었다. 예린은 정확한 권한 구조를 확인할 때까지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
"누가 책임지는지 숨기는 구조 자체가 문제예요. 그래도 책임질 사람을 근거 없이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지훈의 휴대전화로 문자가 도착했다.
'황주석입니다. 이전에 제출한 000번 원본을 확인한 분과 다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구은정 씨가 동석하면 좋겠습니다.'
철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사람 때문에 수백 명이 고생한 거 아닙니까?"
"적어도 책임을 묻고 사실을 확인해야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믿자는 건 아닙니다."
오후 두 시, 구은정이 빌린 회의실에서 황주석을 만났다. 벽시계가 크게 째깍거렸다. 주석은 지훈이 생각했던 것보다 마른 사람이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차림에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당신이 만든 겁니까? 적성 양도 계약이라는 거."
지훈이 물었다.
"일부 설계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품 전체를 제가 관리하지는 않습니다."
"설계한 이유는요?"
주석은 한참 말이 없었다.
"사람이 퇴사해도 회사에는 해야 할 일이 남습니다. 경력자가 떠나면 기술이 사라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래서 업무를 기록하고 넘기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교육용이었어요."
"그런데 왜 사람의 감각이 사라집니까?"
"처음부터 그런 결과가 나타난 건 아니었습니다."
주석은 서류를 펼쳤다. 일련번호가 붙은 실험 기록들이었다. '행동 절차 추천', '작업 모방 지원', '실시간 적성 일치'라는 제목이 이어졌다. 끝의 한 장에는 빨간 문장이 있었다.
'제공자 반응 저하 확인. 추가 체험 중단 권고.'
작성 날짜는 석 달 전이었다.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도 계속했습니까?"
"그 뒤 운영 권한을 빼앗겼습니다. 저는 개발을 중단하자고 했어요."
은정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그전까지 동의 없는 기록을 수집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요?"
주석은 고개를 숙였다.
"제게도 있습니다."
철민이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주석이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서 사라진 시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은정은 실험 기록의 출처와 변경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요청했다. 주석은 공식 절차로 제출하겠다고 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지훈이 마지막 질문을 했다.
"왜 000번 원칙을 바꿨습니까?"
주석은 얼굴을 들었다.
"원칙은 바꾸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복제했죠. '거절'이라는 문구를 지우지는 않았어요. 대신 그 옆에 '대체 인력 추천'을 붙였습니다. 누구도 원본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게."
지훈은 손가락을 꽉 쥐었다.
"결국 남의 대답을 다른 질문의 답으로 쓴 거군요."
주석은 부정하지 못했다.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다경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어젯밤부터 이상하게도 무대 음향의 작은 결함들을 다시 구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오전에 두 시간 작업하자 감각이 또 흐려졌다.
"돌아오는 것 같다가 멀어져요. 꼭 누군가 같은 공구를 저하고 번갈아 쓰는 것처럼."
지훈은 주석에게 받았던 기록의 마지막 장을 떠올렸다.
'제공자 반응 저하.'
아래에는 손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공유 가능한 기술과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경험을 구분할 것.'
주석의 글씨였다.
그 구분을 지켜야 할 사람이, 가장 먼저 그것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지훈을 오래 침묵하게 했다.
제5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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