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악당들의 직업소개소 · 54화
PAYLUA ORIGINAL · 제54화

54화. 동의서의 가장 작은 글씨

악당들의 직업소개소 · 1,904자

오프라인 책장
나예린은 행사장을 해킹하지 않았다. 대신 공개적으로 배포된 안내문 세 가지를 책상 위에 놓았다. 건물 입구에서 받은 종이, 지원자 휴대전화에 뜬 전자 동의서, 서다경에게 보내진 양도 예정 통지였다. 같은 행사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문장의 순서가 서로 달랐다. "전문 용어가 다른 게 아니라, 권리를 쓰는 방식이 달라요." 예린이 종이를 손끝으로 짚었다. 첫 번째 안내문은 '적성 체험을 제공한다'고 했고, 두 번째에는 '체험 품질을 위해 정보를 활용한다'고 되어 있었다. 세 번째에는 '상담 참여를 적성 양도에 대한 사전 동의로 본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세 문장 사이 어디에도 실제로 누구의 감각이나 기억이 옮겨질 수 있다는 설명은 없었다. "이건 작게 써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내용을 써 놨는데요." 철민이 말했다. "그래서 확인해야 한다는 거죠. 누가 언제 이런 문서를 받았는지, 실제로 어떤 확인을 했는지요." 지훈은 다경에게 물었다. "이 자료를 외부 검토 기관에 제출해도 될까요? 이름 공개 여부도 직접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름은 제 이름으로 내세요. 대신 공연장 이름은 빼 주세요. 제가 일을 못 한다는 소문만 나면 그곳까지 피해를 봅니다." 예린은 동의를 받아 필요한 부분만 사본으로 정리했다. 누군가의 선택을 보호하려면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세부사항까지 퍼뜨리지 않는 일도 필요했다. 오후 두 시, 박이안은 행사장에서 받은 계약서를 가져왔다. 합격 확인란 아래에는 낯선 항목이 붙어 있었다. [적성 체험권 사용 기간: 최대 30일] [기술 적합성 보장: 이용자 책임] [원천 제공자 정보: 비공개] "저는 삼 분 동안 움직인 손 때문에 삼십 일 계약을 하라고 들었어요. 제가 진짜 일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서명하셨습니까?" "아뇨. 누가 화낼까 봐 그냥 나왔어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어요. 그리고 서명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따로 남겨 둡시다." 그날 오후 다경은 구은정과 통화했다. 원본 심사자로 재단의 기록을 확인했던 은정은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이 문서만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단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실제 의사와 다른 동의 기록이 만들어졌다면 따져 볼 근거가 있습니다. 제공자와 이용자 모두에게 확인할 내용이 있어요." "그럼 오늘 다섯 시 반 체험은 취소할 수 있습니까?" "운영사에 취소 요구를 보내고 수신 기록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시스템을 끄는 권한은 저에게도 없어요." 서다경은 손목시계를 봤다. 네 시 십 분이었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제가 직접 전화하겠습니다. 제 이름으로요." 통화는 십 분 넘게 이어졌다. 상담원은 계약 번호를 요구했고, 다경은 계약을 맺지 않았다고 반복했다. 상담원은 한참 뒤 '기존 상담 이력을 통해 자동 등록됐을 수 있다'며 담당 부서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다경은 기록용 종이에 통화 시각을 남겼다. "오늘은 끝나겠죠?"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다섯 시 십팔 분, 예린의 휴대전화에 새로운 공개 공지가 떴다. 취소 요청을 받은 양도 대상자들이 '일시 이용권 풀'에 편입된다는 내용이었다. [양도인 이의 제기 접수: 1건] [상태 변경: 직접 양도 보류] [일시 체험 이용권: 유지] 지훈이 물었다. "양도는 보류했는데 체험은 계속하겠다는 겁니까?" 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프로그램은 계약을 취소하라는 말을, 더 짧은 계약으로 바꾸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바로 그때 공지 아래에 새로운 광고가 나타났다. '오늘 저녁, 누구나 하루 동안 천재가 되는 오디션.' 주최자는 공석관리재단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미래재능거래소.' 다경은 빈 동의서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아직 서명하지 않은 종이가, 이미 여러 사람의 내일을 움직이고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54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54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