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악당들의 직업소개소 · 51화
PAYLUA ORIGINAL · 제51화

51화. 최초로 거절한 사람

악당들의 직업소개소 · 2,014자

오프라인 책장
여자는 서류를 접는 대신 책상 한가운데 펼쳐 놓았다. '개인의 직업 적성 양도 동의서.' 오지훈은 그 제목을 두 번 읽었다. 적성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은 뒤 처음 접하는 문서였다. 예전 같았으면 종이 위로 검은 경고가 떠올랐을 것이다. 지금은 글자와 잉크 얼룩, 접힌 자국만 보였다.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서다경입니다. 이 이름으로 상담했던 기록은 없을 거예요. 당시에는 번호로 불렸거든요. 영영 지워지지 않을 번호라고 하더군요." "000번이요?" 다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쉰 살을 훌쩍 넘긴 얼굴이었다. 손등에는 오래된 납땜 흉터가 있었고 검지 끝에는 가는 실선 모양의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조그만 종이봉투에서는 구식 전자부품 냄새가 났다. "저는 원래 무대 음향 장비를 고쳤어요. 공연이 끝나면 조명보다 먼저 케이블부터 감았죠. 다들 무대 위 사람만 보지만, 무대 뒤에는 소리를 붙잡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지훈은 기록지를 꺼냈다가 잠깐 멈췄다. "상담 내용을 남기는 데 동의하십니까? 원하시면 이름 없이 메모만 하겠습니다." "이름을 쓰세요. 오늘은 번호로 불리고 싶지 않아서 왔으니까." 다경은 서류 첫 장을 가리켰다. 예전에 신청하지도 않은 회사의 면접이 잡혔고, 면접에 참석하지 않자 '적성 미활용에 따른 회수 대상'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 그녀는 면접을 거절했다. 이후 오혜숙이 그 사례를 토대로 '거절은 절차의 종료'라는 000번 원칙을 작성했다. "혜숙 씨가 그 원칙을 만들었다는 건 압니다. 왜 첫 거절자와 원칙 작성자를 혼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기록을 가진 쪽이 편한 대로 섞은 걸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일부러요." 다경은 손가방에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케이스를 꺼냈다. 테이프는 없었고, 겉면의 종이에 그녀의 글씨만 남아 있었다. '대답: 거절. 이유: 원하지 않음.' "그때는 이것만 말하면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며칠 전, 제 이름으로 새 계약이 만들어졌습니다." 지훈이 두 번째 장을 살폈다. [양도인: 서다경] [대상 적성: 음향 장비 고장 진단] [양수인: 지정 대기] [동의 확인: 상담 참여 기록으로 대체] "상담 참여 기록을 동의로 바꿔 적었네요." "저는 신청서도 안 냈습니다. 수리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걸 왜 남에게 줘야 하죠?" 문밖에서 빵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강철민이 올라오는 소리였다. 그는 앞치마에 묻은 밀가루를 털다 다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음향 장비요? 저 옛날에 체육관 행사장 스피커를 옮겼습니다. 자꾸 한쪽만 소리 나던데." "케이블부터 보셔야 해요. 기계는 소리보다 먼저 연결이 고장 납니다." 다경의 말이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어디서 일을 배웠는지, 어떤 무대가 제일 까다로웠는지 묻자 그녀는 십 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지훈은 적성 수치가 없어도 눈앞의 사람이 무엇에 마음을 쓰는지 알 것 같았다. 나예린이 사무실에 도착하자 다경은 서류를 넘겨주었다. 예린은 먼저 작성 시각과 제공 경로를 확인했다. 발신 회사를 검색해 본 뒤 얼굴을 찌푸렸다. "이 회사, 공석관리재단의 계약 운영사 중 하나예요. 그런데 문서에 적힌 동의 시각이 이상해요." "어떻게요?" "서다경 씨가 여기 오시기 전, 어젯밤 열한 시 십육 분이에요." 다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 시각에는 집에서 고장 난 라디오를 고치고 있었어요." 예린은 화면을 더 들여다보았다. 서명 그림은 없었다. 대신 별도의 항목이 있었다. [적성 양도 확정 예정 시각: 오늘 18:00] [양수인 우선 면접: 13:00] 지훈은 벽시계를 봤다. 오전 열한 시 사십칠 분. "어느 면접장입니까?" 다경은 평소보다 작게 대답했다. "바로 옆 건물이에요. 제가 거절했던 그 자리로,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부른답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이름표를 뒤집었다. 뒷면에 새로 인쇄된 번호가 있었다. '000번 — 원본 적성 제공자.' 그 순간 지훈은 깨달았다. 재단이 팔기 시작한 것은 빈 의자가 아니었다. 의자에 앉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의 시간이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51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5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