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이 기자회견을 제안했을 때 가장 먼저 반대한 사람은 나예린이었다.
"우리는 전국 4,812개 자리의 주인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서서 모든 사람 대신 말하면, 재단이 하는 짓과 뭐가 달라요?"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가서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마음은 컸다. 하지만 그 마음이 커질수록 자신은 어느새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대표가 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확인된 사실만 공개해요.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빼고요."
예린은 두 개의 자료를 준비했다. 첫째는 허락을 받고 정정 요청을 제출한 사례들의 공통점. 둘째는 재단의 공개 계약 조항이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는지 보여 주는 개정 이력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사내 자료나 개인 근로기록은 넣지 않았다.
구은정은 발표문 첫 줄을 고쳤다.
'전국 4,81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라는 문장을 지우고, '공석관리 프로그램의 일괄 처리 대상이 4,812개 자리로 표시됐으며 실제 피해 규모는 검증 중이다'라고 적었다.
"이렇게 쓰면 덜 무서워 보이는데요."
철민이 말했다.
"덜 무서워 보이는 게 사실이면 그렇게 써야죠."
지훈이 대답했다.
발표 장소는 소개소 건물 앞이 아니라 지역 공공회의실이었다. 관련 기관에 접수한 이의 제기와 자료 보존 요청 사실을 알리고, 필요한 사람은 각자의 계약 관계에 따라 공식 상담을 받도록 안내하는 작은 설명회였다. 발표문에는 참여를 요구하는 문장도, 구직자들에게 연락처를 남기라는 문장도 없었다.
문하나는 회사와의 분쟁이 진행 중이어서 공개 발언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이 검토한 문서의 공개 가능한 부분에 한해서만 설명 자료 작성에 참여했다. 김지연은 직접 참석하는 대신 자신의 사례를 익명화한 문장을 사용해도 된다고 밝혔다.
"저는 제 경험을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제 이름이 검색되면서 앞으로 면접에서 불이익받는 건 원치 않아요."
지훈은 그 선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설명회 당일, 류민서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면접을 본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며 지훈에게 작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아직 채용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공장 무단결근 기록 때문에 면접이 취소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지훈은 긴장이 조금 풀렸다.
발표가 시작되자 기자 한 명이 날카롭게 물었다.
"백도식 회장과 지금 협력하시는 겁니까? 전에는 그 사람이 가해자라고 하셨잖아요."
"백도식 씨의 진술과 자료 보존 요청은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책임이 사라졌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이 자리는 그분을 변호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
"직업을 되찾아 준다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지훈은 잠깐 말을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본 숫자 하나를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숫자로 공개된 사실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근로자들이 실제로 남긴 진술과 확인 가능한 문서입니다."
발표가 끝난 뒤 몇몇 지역 업체가 자동 배정 연동을 잠시 중단하고 계약 내용을 검토하겠다고 알렸다. 그것은 좋은 징후였지만, 전국 운영이 정지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반대로 일부 운영사는 허위 사실이라며 반박 자료를 냈다. 은정은 모두 날짜와 근거를 구분해 보존했다.
저녁에는 뜻밖의 연락이 왔다. 황주석이 자신에게도 발언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사람을 불러야 해요?"
철민이 물었다.
"공개 설명회 무대에 세우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확인 절차에서 얘기할 기회는 있을 겁니다."
그때 예린의 노트북 화면에 공석관리 프로그램의 새 공지가 떴다.
'일괄 배정 지연으로 인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긴급 승계 절차를 시행합니다.'
[시작 예정: 내일 오전 9시]
[대상: 미확인 4,812개 자리]
[신규 조건: 본인 응답 없을 시 기본 동의 처리]
지훈의 손목시계는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적성 분석 권한 회수까지 열한 시간 남짓.
긴급 승계는 그보다 한 시간 먼저 시작될 예정이었다.
제4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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