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정은 테이프를 바로 틀지 않았다.
보관기관에서 허용한 장소에 모인 사람은 지훈과 오혜숙, 정태식, 그리고 자료를 검증할 담당자뿐이었다. 테이프에 등장하는 지원자는 오래전에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고, 원본의 목소리를 공개할 의사를 밝힌 적도 없었다. 은정은 법적으로 열람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필요한 부분만 확인하고, 개인정보가 드러나는 부분은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황주석 씨는 어디 있습니까?"
지훈이 물었다.
"별도로 조사에 응하고 있어요. 테이프를 제출했다고 해서 그분 설명이 곧 사실이 되는 건 아닙니다."
담당자가 사본 재생기를 켰다. 오래된 테이프의 잡음이 좁은 방을 채웠다. 누군가 의자를 끄는 소리, 종이를 넘기는 소리, 기침. 그리고 여성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지만 그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상담원이 말했다.
'급여도 좋고, 숙소도 제공됩니다. 다른 지원자가 많으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아버지가 혼자 계십니다.'
'그럼 가족과 상의해 보세요. 일단 배정만 해 두면 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성이 다시 말했다.
'일단이라는 말이 무서워요. 지금 싫다고 하면 나중에는 안 된다고 못 할 것 같아서요.'
그때 오혜숙의 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분은 거절하셨습니다. 더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녹음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마이크 가까이에서 작게 웃었다.
'그럼 빈자리는 누가 책임집니까? 신청서도 제출해 놓고 취소하면 그만입니까?'
혜숙이 답했다.
'신청은 계약이 아닙니다. 빈자리는 사람 대신 남겨 두면 됩니다.'
지훈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오 년 뒤 자신이 구은정과 빈 의자 앞에서 했던 말과 똑같은 뜻이었다.
담당자가 재생을 멈췄다.
"여기부터는 업무 회의 녹음이 섞여 있습니다. 별도의 열람 검토가 필요합니다."
은정은 확인된 문장만 적었다. 당사자의 거절이 있었고, 혜숙이 그것을 수락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사건이 오늘의 계약 프로그램과 직접 연결된다는 뜻은 아직 아니었다.
혜숙은 한참 동안 손등을 문질렀다. 예전 인쇄소에서 묻었던 보라색 잉크 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저분은 나쁜 조건을 거절한 게 아니에요. 자기 삶에 맞지 않는 조건을 거절한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구분하지 못했죠."
정태식은 눈을 내리깔았다.
"나중에 그 기록을 '채용 실패'로 옮긴 사람이 저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팀 전체 목표치를 매겨서요."
"그럴 수도 있다가 아니라, 무엇을 했는지 확인해 주세요."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
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난 뒤 자신의 오래된 업무 일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날 오후, 황주석의 공식 의견서 사본 가운데 공개 가능한 부분이 전달됐다. 그는 자신이 '거절된 배정'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모형을 제안했고, 이후 운영사가 그 비용의 거래 구조를 개발했다고 진술했다. 계약의 최종 결정권은 여러 회사에 나뉘어 있었다. 황주석이 모든 일을 혼자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문장은 분명했다.
'000번은 재배정 예외로 남아 있어야 했으나, 이후 자동 재배정 실패 비용 항목으로 전용되었다.'
지훈은 글을 여러 번 읽었다.
"거절을 존중하자고 만든 번호를, 거절의 값을 매기는 데 쓴 거네요."
"그렇게 볼 근거가 생겼습니다."
은정이 대답했다.
지훈이 소개소로 돌아왔을 때 예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화정밀과 같은 방식의 배정 통지가 다른 세 지역에서 확인됐다는 소식이었다. 공개 상담을 신청한 사람만 셌고, 나머지 대상자를 일괄 피해자로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에 이상한 항목이 있었다.
[공석 관리 실패 비용 — 000번 약관 적용]
[적용 대상: 상담 거절자 포함]
"이건 비용을 청구하겠다는 겁니까?"
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구가 있다는 것까지 확인했어요. 실제 청구나 법적 효력은 별도로 봐야 해요."
지훈의 눈앞에서는 000번이라는 글씨가 검게 흔들렸다.
[000번 원칙 / 현재 사용 방식: 역전]
[정정 주체: 원본 작성자 승인 필요]
지훈은 오혜숙을 떠올렸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제시한 '원본 작성자 승인'이라는 절차도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화면 아래에 누군가의 이름이 나타났다.
[원본 작성자: 오혜숙]
[원칙 변경 요청자: 황주석]
[현 상태: 승인 불명]
혜숙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혜숙만이 결정할 수 있었다.
제4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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