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나는 공석관리재단의 임시 심사 담당자 후보로 적힌 통지서를 찢지 않았다.
구겨진 종이 대신 투명 파일에 넣어 가지고 왔다. 새 출발 직업소개소에는 전날 채용 공고를 보고 방문한 사람들의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문 앞에서 잠깐 기다렸다가 지훈에게 말했다.
"이 자리에 지원하겠습니다."
지훈은 피곤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무슨 자리요?"
"재단이 지정한 심사자가 아니라, 그 심사가 잘못됐는지 확인하는 사람요."
구은정이 하나의 경력증명서를 보았다. 하나는 오랫동안 산업 현장의 교육과 인력 배치 데이터를 관리했고, 배치 결정 과정에서 직원들의 동의 여부가 빠지는 문제를 발견해 내부적으로 여러 번 보고한 적이 있었다. 자격은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이해관계가 있죠."
하나가 먼저 말했다.
"제 이름이 대체 심사자 후보에 올라 있었으니까요. 제가 최종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는 것 압니다. 대신 자료 정리와 누락 확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으로는 참여할 수 있겠습니다. 역할과 접근 범위를 문서로 남기죠."
하지만 이야기는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하나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부서장은 그녀에게 복귀하면 불이익 없이 업무를 계속할 수 있다고 했다. 단, 외부 단체와 관련된 활동은 중단하는 조건이었다.
"원하는 일이 있으면 회사 안에서 해라. 밖으로 일을 키워서 무슨 이득이 있겠니."
통화가 끝나자 하나는 한참 창밖만 보았다. 맞는 말처럼 들리는 부분도 있었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에게 직장을 잃는 위험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지훈은 쉽게 나서지 않았다.
"저희 때문에 회사를 그만둘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 씨 선택이 최우선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선택이 두 개면요?"
"두 개요?"
"지금 직장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고, 내가 확인한 거짓을 덮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어요. 둘 다 진짜예요."
하나는 벽에 붙은 안내문을 바라봤다.
'원하지 않는 일을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문장은 좋은데요. 거절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까지 해결해 주진 않네요."
그 말에 지훈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그동안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당신이 선택하세요'라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은정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선택을 응원하는 것과 선택 뒤의 부담을 함께 나누는 건 다른 일이에요. 그렇다고 우리가 대신 결정할 수는 없지만요."
하나는 이틀 동안 고민한 끝에 회사에서 요구한 포괄적인 활동 중단 확인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의 내부 자료를 무단 반출하지도 않기로 했다. 공개 가능한 사실관계와 본인이 직접 경험한 내용만 증언하고, 나머지는 정식 조사 절차에서 다루겠다고 했다.
"그럼 이 심사의 합격자는 아닌 거네요."
하나가 웃자 지훈도 따라 웃었다.
"원래 심사 자체가 누굴 뽑는 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게 마음에 들어요. 불합격할 수도 있는 자리라서요."
그날 하나는 이름을 적은 새 문서를 제출했다.
'재단의 대체 심사자 지명을 거절합니다. 다만 강제 배정 절차를 검토하는 자료 정리에는 독립적인 이해관계 공개를 조건으로 참여하겠습니다.'
문서가 접수되자 지훈의 눈앞에 문장이 떠올랐다.
[문하나 / 심사 승계 후보 지위 해제]
[개인 직업 적성: 변화 없음]
하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날 밤, 하나의 회사 메일함에 새로운 통지가 도착했다.
'인사 배치 검토 중. 외부 활동 관련 사실 확인 요청.'
마지막 줄은 더 불길했다.
'공석관리재단과의 정보 협조 계약에 따라 해당 사실을 통보합니다.'
하나는 메일을 지훈에게 그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자기 이름과 회사 정보를 가린 뒤, 어떤 절차로 대응할 수 있는지만 상담받았다.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데에는 큰 구호보다 작은 경계가 먼저 필요했다.
제3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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