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봉투의 봉인은 반쯤 떨어져 있었다.
구은정은 그것부터 기록했다. 봉투가 훼손된 경위가 불분명하다고 적고, 안에 든 문서를 무조건 원본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작은 말 차이가 중요합니까?"
철민이 물었다.
"중요하죠. 누가 종이를 바꿔 넣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확인할 수 없는 건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안쪽에는 낡은 취업 박람회 상담지 세 장이 있었다. 첫 장에는 오지훈의 이름이 상담 진행자로, 백도식의 이름이 상담 신청자로 적혀 있었다.
[상담 목적: 직업 변경 가능성 확인]
[신청 직무: 미정]
[상담 결과: 본인의 직업 선택을 보류함]
세 번째 줄은 지훈이 전에 보았던 '본인의 직업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음'이라는 문구와 달랐다.
"누군가 표현을 바꿨네요."
예린은 두 문장을 나란히 놓았다. 한쪽은 선택을 미뤘다는 말이고, 다른 한쪽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차이는 작아 보였지만 결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때 제가 상담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지훈이 말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왔어요. 사장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자기 일에 지쳤다고 했습니다. 제가 어떤 직업을 원하냐고 물었더니 아무거나 잘할 수 있다고 했어요."
은정이 물었다.
"그 사람에게 특정 직업을 추천했나요?"
"기억나는 건, 시계를 고치던 얘기를 했다는 겁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괜찮다고요."
그 말에 지훈은 18화의 면담을 떠올렸다. 백도식이 고장 난 시계를 손에서 놓지 못하던 모습. 어쩌면 그 사람에게도 오래전 선택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둘째 장에는 다른 필체로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직무 배정 보류자를 반환 심사자로 이동. 대체 배정이 가능하도록 동의 간주.'
하단 서명란에는 지훈의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 자필 서명도 아니었다. 그 옆에는 동그라미 속 빈 의자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인주 자국의 가장자리가 어색했다. 날짜가 상담지보다 여섯 달 뒤였다.
"어떻게 이런 게 제 서명이 됩니까?"
"안 됩니다. 적어도 이런 종이만으로는 당신이 동의했다고 볼 수 없죠."
은정은 분명하게 말했다.
정태식은 오래전 회사에서 사용하던 양식을 확인했다. 해당 칸은 본래 담당자의 확인 번호를 적는 곳이었다. 그런데 재단으로 자료를 옮기는 과정에서 '승인자 서명'으로 명칭이 바뀐 흔적이 있었다.
"제가 만든 양식이 이런 데 쓰인 겁니다."
태식의 목소리가 잠겼다.
"제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제가 아는 걸 숨길 수는 없겠죠."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실제로 바꾼 부분과 누가 나중에 바꾼 부분을 나눠서 정리해요. 그래야 증거가 되죠."
그때 오혜숙이 셋째 장을 발견했다. 용지가 유난히 얇았다. 종이 안쪽에는 희미한 필압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혜숙이 서류를 비스듬히 들어 빛에 비췄다.
"이거 제가 쓴 글씨예요."
지훈이 다가갔다.
'상담 내용을 계약 승낙으로 전용하는 것에 반대함.'
마지막 글자는 잘려 있었다. 혜숙은 종이의 경계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날 제가 반대 의견을 남겼는데, 다른 서류와 떨어져 보관됐어요. 이 페이지에는 날인이 안 돼 있네요."
은정이 말을 받았다.
"도장이 없어서 무효라고 주장했겠죠. 그런데 반대 의견은 누군가의 허가가 있어야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공식 절차에 접수됐는지는 확인해야 해요."
지훈은 문서 위의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름을 인쇄하고 직무를 바꾸고 서류를 이동시키는 동안, 정작 당사자의 말은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적성창이 흔들렸다.
[상담기록 019 / 문구 불일치 감지]
[결과값: 미확정]
[118번 승인 근거: 오류 가능성 높음]
예린이 기록 사본을 저장한 뒤 정기 백업 장치의 연결을 끊었다. 자료의 출처를 표시하고, 관련 기관에 원본 대조를 요청할 계획이었다.
바로 그때 백도식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오지훈. 자네가 그날 서류를 봤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누가 알려 줬습니까?"
백도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문서 중 하나에는 내가 한 말이 빠져 있어."
"무슨 말입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그들은 그게 새로운 직원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적었지."
지훈의 눈앞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누락된 구술 기록 존재]
[보관 위치: 공석관리재단 청문 자료실]
백도식이 낮게 말했다.
"그걸 들으러 가려면 나도 가야겠군."
제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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