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아직도 제 눈에 118번이 보입니다."
지훈이 대답하자 구은정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잘못된 답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럼 거절을 기록했지만, 그 지위를 해지한 건 아니군요.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제 이름을 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른 사람을 대신 넣으려 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당신 한 사람의 퇴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사람을 자동으로 밀어 넣는 절차를 검토해야 해요."
은정은 회의용 테이블 위에 종이 세 장을 놓았다. 첫 장에는 '기록', 둘째에는 '동의', 셋째에는 '결과'라고 썼다.
"이 셋은 서로 다른 겁니다. 기록이 존재한다고 동의가 있는 건 아니고, 동의가 있었다고 모든 결과가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죠."
철민은 '결과'라는 글씨를 보더니 말했다.
"그러면 제가 예전에 회장님 회사에서 받은 월급도 다시 봐야겠네요. 통장에 찍혔다고 제대로 받은 건 아니니까."
"바로 그겁니다."
은정은 철민의 말을 첫 번째 진술로 적었다. 그러나 철민이 적지 않은 부분은 임의로 보충하지 않았다. 전 직장 경력과 급여에 관한 추가 사실은 철민 본인이 확인하겠다고 했을 때만 기록했다.
지훈은 한동안 그것을 지켜봤다. 자신은 상대의 적성을 봤다는 이유로 중요한 사실을 알아낸 듯한 기분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은정은 오히려 모르는 부분에 빈칸을 남겨 두었다.
예린이 노트북을 가져왔다. 지난 30화에서 확보한 118번 자동 교체 통지와 실제 발송 경로, 그 시각에 보관한 사본의 대조표가 들어 있었다.
"원본 파일의 생성 주체를 아직 특정하진 못했어요. 다만 교체 통지에 세 사람 이름이 실렸고, 아무도 승낙하지 않은 건 확인됐습니다."
은정은 문서를 훑다가 한 줄에서 멈췄다.
'독립 확인자 지정 요청 가능.'
"이 문구는 누가 만들었나요?"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그럼 독립적이라는 것도 시스템이 정한 기준이네요. 우선 그 기준이 누구에게 유리한지 따져 봅시다."
문하나가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아직 승진 거절로 인한 부서 이동 심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를 위해서 증언하는 일이 부담되지 않습니까?"
"부담됩니다."
하나는 단호했다.
"하지만 제가 신청한 일이에요. 회사 얘기를 전부 공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제 이름이 허락 없이 대체 심사자 후보로 쓰인 사실을 말하겠다는 거예요."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범위를 따로 적읍시다.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는 점도요."
하나는 서명하기 전에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러다 한 부분을 가리켰다.
"'본인은 제도 개선을 위한 증언에 동의함'이라고 쓰지 마세요. 너무 넓어요. 그냥 제가 본 발령 통지서와 그 뒤에 적힌 이름 세 개에 대해서만 진술할게요."
은정이 웃었다.
"좋은 수정입니다."
철민이 지훈의 팔꿈치를 쿡 찔렀다.
"저분도 상담사님 일 잘하시겠는데요?"
"저보다 서류는 확실히 잘 보시네요."
그날 오후, 회사 담당자가 박선규의 빵집을 찾아왔다. 강철민이 노동 기록을 정정해 달라고 요청한 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훈은 대리인처럼 앞서 나가지 않았다. 철민이 직접 설명했고, 박 씨는 새 직장에서의 근무 기록만 확인했다. 과거 회사 관련 서류는 별도 기관의 검토를 받기로 했다.
작은 일 같았지만 지훈은 그날 처음으로 118번의 불필요함을 느꼈다. 자신이 누군가의 직업을 판정해 주지 않아도 당사자가 자기 경험을 설명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 은정이 종이 세 장을 다시 펼쳤다. 그 아래 새 항목을 추가했다.
'기록의 작성자.'
'동의의 당사자.'
'결과의 책임자.'
"오지훈 씨. 당신은 누가 만든 기록 때문에 이 방에 묶였습니까?"
"제 이름으로 된 상담 기록 때문입니다."
"그 상담 기록의 원본을 본 적은요?"
"아니요. 19번 기록도 일부만 봤습니다."
은정이 가방에서 오래된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럼 이제 원본을 보실 차례네요. 다만 준비할 게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 대신 적은 문장에, 당신이 다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세요."
봉투에는 날짜가 찍혀 있었다.
오 년 전 4월 17일.
바로 백도식이 상담 신청자로 기록된 날이었다.
제3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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