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봉투를 놓아둔 채 밤을 보낸 지훈은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의자부터 셌다.
상담실 안에는 세 개가 있었다. 자신의 것, 손님의 것, 그리고 어젯밤 정태식이 창고에서 꺼내온 접이식 의자. 아무도 앉지 않은 마지막 의자를 바라보자 시야에 검은 글씨가 겹쳤다.
[원본 심사자 접근 예정]
[빈자리 유지 상태: 정상]
"빈자리 유지가 정상이라니. 누가 보면 사무실에 의자가 모자란 줄 알겠네."
지훈이 중얼거리자 강철민이 계단에서 빵 상자를 들고 올라왔다.
"그럼 하나 더 갖다 놓을까요? 박 사장님 창고에 둘 있어요."
"아닙니다. 아직 우리 쪽 가구비도 못 갚았어요."
철민은 심각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어제 만든 식빵이었다. 아래쪽 한 덩이는 조금 찌그러졌지만 위쪽은 반듯했다.
"박 사장님이 드시래요. 오늘은 내가 반죽 상태를 다 맞췄거든요."
"월급 받은 제빵사가 소개소에 도시락까지 가져오네요."
"도시락 아니고 상품입니다. 찌그러진 건 팔 수가 없어서요."
그 말에 지훈은 웃었다. 철민이 자기 일의 기준을 갖게 된 게 무엇보다 반가웠다.
오전 아홉 시 정각, 소개소 문이 열렸다. 회색 운동화에 남색 재킷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육십은 넘어 보였고, 손에는 바퀴가 닳은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취업 상담하러 왔습니다."
여자는 굳이 빈 의자에 앉지 않았다. 문 가까운 손님용 의자에 앉더니 신분증 대신 낡은 수첩을 꺼냈다.
"어떤 일자리를 찾으십니까?"
"내가 한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아도 되는 일. 그런 일자리가 있나요?"
지훈은 질문을 서류에 그대로 적었다. 능력을 쓰기 전에 희망 근무 시간과 경력, 원하는 업무부터 물었다. 여자는 대학에서 기록학을 가르쳤고, 이후 오래된 공공 취업 지원 사업의 심사 기록을 검토했다고 했다.
"이름은요?"
"구은정입니다."
그제야 지훈의 눈앞에 적성창이 떠올랐다.
[구은정 / 잠재 직업 적성: 기록 복원 99.3%]
[현 직무: 원본 심사자]
[접근 권한: 000번 원칙의 증언자]
[주의: 대상자의 역할과 의사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지훈은 펜을 멈췄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보였죠?"
"제가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아십니까?"
"오혜숙 씨가 말해 줬습니다. 당신이 사람들 위에 글자를 본다고요. 그것이 진짜여도 그 글자가 곧 사람의 동의는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고요."
지훈은 수첩을 다시 펼쳤다.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선 질문 하나를 받을게요. 이 의자에 아무도 앉지 않기로 한 건 누구 결정입니까?"
"아직 누구에게도 앉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괜찮겠네요. 그런데 그걸 사람 대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은정은 봉투에서 똑같은 빈 의자 문양이 찍힌 출석표를 꺼냈다. 다만 공석관리재단의 도장 아래에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원본 심사의 목적은 승계자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승계가 필요한지 먼저 확인하는 데 있다.'
"공석관리재단에서 보내셨습니까?"
"재단은 내가 오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을 보낼 예정이었죠. 나는 그 심사에 이의를 낸 사람이고요."
지훈은 예린에게 연락했다. 증빙 자료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뜻이었다. 은정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방에서 연락처와 회신을 받을 수 있는 기관 문서를 꺼내 놓았다.
"확인하십시오. 다만 내가 보여 주는 문서만 믿지는 말고요."
한 시간 뒤 오혜숙이 도착했다. 그녀는 구은정을 보자 현관에서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정말 오셨군요."
은정이 일어섰다.
"혜숙 씨가 남긴 이의 신청서를 이제야 받았어요. 늦었습니다."
혜숙은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는 말보다 왜 그동안 접수가 안 됐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왔어요. 받지 않은 거절이 일곱 건이 아니라, 접수되지 못한 거절이 몇 개인지 확인하려고요."
그때 지훈의 시야에 숫자가 떠올랐다.
[심사 대상 변경]
[기존: 118번 반환 심사자]
[변경: 118번 심사 절차의 적법성]
잠시 후 은정이 빈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일은 저 의자를 치우셔도 됩니다. 오늘은 그대로 두세요. 누군가를 앉힐 목적으로 비워 둔 자리인지, 아무도 앉지 않을 수 있도록 비워 둔 자리인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지훈은 그 말이 묘하게 어려웠다. 의자는 똑같은데 뜻이 전혀 달랐다.
은정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오지훈 씨, 첫 번째 심사 질문입니다. 당신이 118번을 거절했을 때, 정말 그 자리에서 나왔습니까?"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거절한 뒤에도 118번이라는 화면은 여전히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제3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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