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여덟 시 십이 분, 소개소 컴퓨터가 혼자 켜졌다.
지훈은 전원을 내리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화면에는 전날 작성한 상담 기록이 아니라 검은색 창 하나가 떠 있었다.
[118번 채용 절차 진행 중]
[추천인: 백도식]
[지원자: 오지훈]
지훈은 전원 케이블을 뽑았다. 화면은 꺼졌다. 동시에 휴대전화에 낯선 메시지가 도착했다.
'컴퓨터 계속 끄세요. 저 사람들이 원격으로 보고 있어요.'
발신번호가 없었다.
'누구십니까?'
답장은 빨랐다.
'당신이 어제 데려간 강철민 씨, 죽이려는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해고시키려는 사람은 많아요.'
그리고 지도 한 장이 왔다. 소개소 건물 뒤편의 무인 빨래방이었다.
지훈은 위치를 저장했다. 사람을 만나기 전, 철민에게 상황을 알렸고 박 씨에게 점심 무렵까지 빵집을 잘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어제의 명함을 챙기되 컴퓨터에는 연결하지 않았다.
빨래방의 회전 건조기 앞에 스물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헐렁한 후드티와 낡은 운동화, 무릎 위에는 얇은 노트북 하나. 여자는 지훈을 보자 먼저 가방을 닫았다.
"오지훈 씨?"
"문자 보낸 분이세요?"
"나예린. 현재는 무직입니다."
"현재는요?"
"어제까지 미래인력개발 전산 담당이었으니까요."
여자는 맞은편 의자를 발끝으로 밀었다.
"앉아요. 서 있으면 감시 카메라에 얼굴이 더 잘 나옵니다."
"카메라를 피하려고 오셨어요?"
"아뇨. 말을 걸 시간을 벌려고요. 오래는 못 있어요."
지훈은 그녀의 머리 위를 봤다.
[나예린 / 잠재 적성: 정보보안 99.4%]
[부가 적성: 디지털 증거 분석 98.8%]
[현 직업 적합도: 불법 침입 9.6%]
[직업 선택 권한: 제한됨]
정보보안. 눈앞의 여자는 아마 조직에서 컴퓨터를 다루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훈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어디까지 가담했는지 능력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는 사람들 직업 적성을 봅니다."
"그거 진짜예요?"
"예린 씨는 공격하는 쪽보다 지키는 쪽 일을 더 잘하실 거예요."
예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당신이 어떻게……"
"재능이 있다고 해서 과거에 한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할 수는 있겠죠."
예린은 한동안 그를 쳐다보다가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화면에는 회사의 직원 명부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업무 지시 메일의 보관본이 있었다.
"백 회장이 직원을 묶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실제 돈. 대출이니 선지급이니 하는 거요. 또 하나는 이상한 계약서."
"이상하다니요?"
"서명한 사람들한테서 일에 대한 감각이 없어져요. 어제까지 잘하던 용접공이 갑자기 용접봉 잡는 법을 잊고, 손 빠르던 재봉사가 바늘에 실을 못 꿰죠. 대신 회장이 지정한 일만 할 수 있게 돼요."
지훈은 철민의 적성창에서 본 '봉인' 문구를 떠올렸다.
"그걸 왜 계약이라고 부르죠?"
"계약서 번호가 있어요. 직원마다 하나씩. 화면에서 원본 계약서를 열면 마지막 장이 꼭 비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 날 보면 거기에 서명이 들어가 있죠."
"본인이 서명하지 않았는데도요?"
"그런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퇴사했어요. 아니, 퇴사하려다 쫓겨났죠."
예린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사직 의사 전달 메시지를 보여 줬다. 상대는 이를 수신했지만 답장은 단 하나였다.
'직무 반납은 원칙적으로 불허.'
"회사가 직원 직업까지 소유할 수는 없어요."
"상식으로는 그렇죠. 그런데 그 사람 주변에선 상식이 조금 다르게 움직여요."
여자는 지훈에게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안에는 프린트된 계약서 첫 장 세 장이 있었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같은 개인정보는 가려져 있었다. 대신 왼쪽 상단의 도장만 뚜렷했다.
'미래인력개발 / 직무 지속 동의.'
"원본이나 개인 정보가 담긴 파일을 몰래 가져온 건 아니겠죠?"
"제가 받은 업무 검토 자료를 출력한 거예요. 원본은 회사 서버에 있어요. 몰래 접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끊겼고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습니다. 증거는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모아야죠."
예린의 손가락이 노트북 옆면을 두드렸다.
"백 회장은 제 능력을 좋아했어요. 다만 제게 서버를 지키라는 게 아니라 자기 직원들을 감시하라고 시켰죠.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어요. 직원들이 무엇을 먹는지, 누구와 통화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러다 어떤 사람의 아이가 병원에 가는 날짜까지 보고하라고 했을 때 알았습니다. 이건 보안이 아니구나."
"그래서 왜 저를 도우려는 겁니까?"
예린은 건조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강철민 씨가 예전에 제 동생을 구해 준 적 있어요. 동생을 빚 독촉하러 온 사람들한테서 빼냈어요. 자기가 대신 회장한테 혼나면서."
지훈은 철민이 어제 말한 '누구도 죽인 적 없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의 총합이었고, 하나의 직업명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두 분 다 제 소개소로 오세요."
"정식 채용 제안이에요?"
"아직 돈이 없습니다. 게다가 누가 내일 아침 건물을 부술지도 모르고요. 우선 당사자 동의로 증거를 정리하고, 안전한 상담처와 연결할 겁니다. 그건 제가 할 수 있어요."
"참 대책 없는 상담사네요."
"그래서 상담이 필요합니다."
예린이 처음 웃었다.
그 순간 그녀의 노트북 화면에 빨간 알림이 떴다. 예린은 깜짝 놀라 전원을 닫았다.
"뭔데요?"
"제가 만들어 놓은 퇴직자 계정 종료 확인 알림이에요. 계정이 끊기면 연락이 오게 해 놨거든요. 그런데……"
그녀는 손목시계를 봤다.
"오늘 아침 아홉 시에 폐기하기로 했던 계약서가 방금 재발급됐대요."
"누구 계약서요?"
"오지훈 씨요."
지훈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검은 명함을 꺼냈다. 118번 칸 아래에 글씨가 하나 더 생겼다.
[직무: 계약관리실 상담사]
[예정 면접: 금일 12:00]
아직 지원한 적도 없는데 면접 일정이 잡혀 있었다.
예린이 차갑게 말했다.
"저 사람은 사람을 데려갈 때 꼭 먼저 직업부터 정해요. 거절할 기회가 없도록."
지훈은 명함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면접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정신 나갔어요?"
"면접은 원래 서로가 조건을 묻는 자리잖아요."
"백도식 회장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알아요. 그러니까 혼자 가지는 않을 겁니다."
지훈의 휴대전화에 박 씨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오 선생! 아래층에 와 봐요. 그 청년, 빵을 굽다가 갑자기 손을 못 움직여요!"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까지 세 시간 사십 분.
강철민의 적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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