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도식의 서명이 있는 문서는 유난히 깨끗했다.
오 년 전 작성된 다른 서류는 모서리가 닳고 잉크가 바랬는데, 그 공문만 어제 인쇄한 것처럼 선명했다. 지훈은 혜숙에게 사본을 요청하되 원본은 공식 보관 절차를 따르자고 했다.
"이 문서가 진짜라면 백도식은 제 계정을 잘못 만들어 놓은 사실을 알고 있었겠네요."
혜숙이 말했다.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서명했을 당시 내용을 그대로 알고 있었는지, 나중에 문서를 바꾼 사람은 없는지. 제가 목격한 건 결재 후에 서류가 넘어가는 과정뿐이에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하고 싶었던 답과 증명할 수 있는 답은 달랐다. 본인이 억울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일을 해서는 안 됐다.
그날 오후, 백도식이 다시 소개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오래된 시계 대신 공문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날 부른 건가?"
"회장님이 결재한 문서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상담을 이어 갈지는 그 다음에 결정하시죠."
백도식은 서류를 보자 작게 웃었다. 놀라서 웃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게 아직 있었군."
"이 내용을 승인했습니까?"
"그랬어."
말이 너무 간단해서 지훈이 오히려 숨을 멈췄다.
"왜요?"
백도식은 탁자 위에 서류를 펼쳤다. 그가 결재한 시기는 공석관리재단이 이미 관련 계약의 전산 처리 권한을 갖고 있던 때였다. 당시 재단은 특정 인원이 대체 심사자가 되지 않으면 기존 직원들의 직무가 중단될 수 있다고 통지했다.
"직원들을 지키려면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런데 자네 이름이 왜 거기 들어갔는지 알아?"
"제가 백 회장님 상담에서 다른 사람의 직업을 가져오는 건 거절했으니까요."
"맞아. 내 말을 거절한 사람이 필요했어. 거절을 알면서도 회사의 반환을 승인할 사람이."
"그 말을 들으면 제게 허락을 구했어야죠."
백도식은 대꾸하지 못했다.
"회장님은 제 이름을 빌렸고, 저는 오 년 동안 그 사실도 몰랐습니다."
백도식은 자기 말을 하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때 그에게 직원의 이름은 숫자 뒤에 따라붙는 정보였다. 직무가 비면 누군가 채워야 했고, 지점 매출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에서 사람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누가 집을 떠나야 하고, 누가 부모를 돌보지 못하게 되는지는 숫자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오셨습니까?"
지훈이 물었다.
"내가 아끼던 직원이 퇴사한 뒤에 처음 알았어. 자기는 승진보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더군. 그때도 잡으려고 했어. 돈을 더 주겠다고."
"그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떠났지. 잘했겠지."
백도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짧은 이야기가 그의 죄를 줄여 주지는 않았다. 지훈은 오히려 그가 사람의 말을 들을 기회를 여러 번 지나쳤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알게 됐다.
"그때는 종이 한 장이면 끝나는 줄 알았어."
"종이 한 장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직업이 바뀌었습니다."
지훈은 서명을 가리켰다.
"회장님이 하신 일의 책임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 그렇다고 내가 전부 고칠 수 있다고 약속은 못 해."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시면 됩니다. 수정 전 원본, 결재 경로, 대체 승인 지시를 받은 기록을 제출하세요."
백도식은 한참 앉아 있었다. 그의 손끝은 무심코 주머니 안 시계의 용두를 만지고 있었다.
"그 서류를 내놓으면 내 회사가 흔들릴 거야."
"누군가의 이름으로 회사가 유지됐다면, 그 구조부터 고쳐야겠죠."
마침내 백도식은 휴대전화로 비서에게 전화했다. 자료 보전과 법률 검토를 요청하고, 직원의 동의 없이 진행된 재배치 승인 작업은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지훈은 그 지시가 실제로 이행되는지 추후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 순간 지훈의 시야에 문구가 나타났다.
[118번 대리 지정의 경위 확인]
[책임 인정: 백도식]
[주의: 책임 인정은 권한 반환과 다름]
백도식이 나간 뒤 예린이 낮게 말했다.
"자기가 한 일을 인정한 건 시작이에요. 그런데 시스템이 멈출지는 별개죠."
지훈도 알고 있었다. 누가 책임을 인정하든, 사람들의 삶은 계속돼야 했다.
저녁에 박선규가 소개소로 올라왔다. 그는 양손에 작은 소보로빵 상자를 들고 있었다.
"철민이가 혼자 반죽한 거야. 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진 않았지만 온도는 봐 줬지."
지훈이 한입 베어 물었다.
조금 짰다.
"어떻습니까?"
박 씨가 물었다.
"직접 만든 맛입니다."
박 씨가 웃었다. 지훈은 차마 소금을 조금 줄이라는 말을 못 했다.
그때 예린의 컴퓨터로 통지가 들어왔다.
'공석관리재단 — 대체 심사자 긴급 교체 예정. 교체 대상: 오지훈.'
지훈이 화면을 바라봤다.
이제 그들은 그의 이름을 빌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예 그 사람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제2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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