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민의 급여가 들어온 것은 분명 박선규의 사업자 계좌에서였다.
급여 명세도 박 씨가 작성했고, 근무 날짜와 금액도 맞았다. 그런데 사내 근태관리 프로그램의 출력본 아래에만 이상한 한 줄이 끼어 있었다.
'118번 반환 심사자 승인 — 오지훈.'
"사장님, 이 프로그램 어디서 설치하셨습니까?"
지훈이 물었다.
"건물 관리인이 소개해 준 거야. 무료로 급여 명세 출력할 수 있다고. 이번 달부터 써 봤지."
예린은 프로그램 이름과 제공사를 확인했다. 미래인력개발의 관계사가 배포한 소규모 사업장용 도구였다. 정상적인 계산 기능 아래에 외부 직무 등록 항목이 숨겨져 있었지만, 이를 악의적인 행위라고 단정하기 전 실제 전송 기록부터 살펴야 했다.
"일단 사용을 멈추고 자료를 보관하세요. 급여 지급과는 분리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서류를 또 제대로 안 본 모양이네."
"사장님 잘못으로 정리하기엔, 설명이 너무 불충분했어요."
지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날 오후, 서정례가 소개소를 찾아왔다. 그녀는 작은 종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위에는 '이관 전 수기 목록'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료를 무턱대고 복사해 드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과 관련된 확인 절차에 필요한 부분은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보관 기록과 출처를 남겨 두겠습니다."
정례는 가장 오래된 상담 기록부터 꺼냈다. 거기에는 이름 대신 번호와 선택지가 있었다.
'000 / 제안 거절 / 불이익 없음.'
그다음 페이지에는 직원이 손으로 쓴 원칙이 있었다.
'일을 소개하는 자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은 직무는 배정하지 않는다. 거절은 빈자리가 아니라 답변이다.'
지훈은 종이를 한참 바라봤다.
"그럼 000번은 계약의 시작이 아니라, 계약을 맺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군요."
서정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센터가 문을 열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기록이에요. 누군가 일을 거절해도 다시 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약속이었죠."
"그 약속이 어떻게 사람의 적성을 빼앗는 시스템이 됐습니까?"
"당사자의 선택을 남기려고 만든 기록이, 어느 순간 관리자의 승인으로 바뀌었어요. 기록을 옮기고 서식을 고치는 동안 거절란이 사라졌죠."
예린은 종이들을 비교했다. 오래된 수기 양식에는 '거절'이 있었다. 중간 시기의 전산 양식에는 '보류'라고 쓰여 있었다. 최신 양식에서는 그 자리가 '재배치 승인 대기'로 바뀌었다.
"거절한 사람을 계속 회사 안에 남겨 두도록 처리했네요."
"그 결과만큼은 제가 확인했습니다.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어느 시점부터 누가 승인했는지는 더 살펴야 해요."
서정례는 자신이 입증할 수 있는 사실만 말했다.
그때 김지연이 찾아왔다. 그녀는 새로 고친 아이 점퍼를 입힌 사진을 보여 줬다. 예전에는 떨리던 손끝으로 이제 짧은 직선 박음질도 할 수 있었다. 백승오는 지역 자전거 공방에서 안전 교육을 받기로 했고, 한미숙은 학교 급식 보조직 공고를 검토 중이었다.
사람마다 회복 속도와 사정은 달랐다. 그 누구도 지훈의 한마디만으로 직업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오민규도 왔다. 식품공장에서는 추가 확인 절차를 마친 뒤 정식 채용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민규는 면접 결과보다 한 장의 수첩을 더 중요하게 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열아홉 번째 기록을 찾았어요."
그가 낡은 종이를 내밀었다.
'19번 상담. 청구인 백도식. 원래 하고 싶던 일: 고장 난 것을 고치는 사람.'
지훈은 숨을 삼켰다.
그 아래에는 상담사의 메모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 갖고 싶다는 요구는 수락할 수 없음. 본인의 적성을 안내함. 상담 종료.'
마지막 줄에는 오지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식 서명이 아니라 상담을 보조한 사람의 확인 표시였다.
오 년 전 지훈은 백도식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온전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민규의 어머니가 남긴 종이와 자신의 수첩은 같은 일을 가리켰다.
바로 그때 지훈에게 검은 창이 떠올랐다.
[19번 상담 기록 대조 완료]
[118번 반환 심사자: 위임 근거 부적합]
[상담 보조 확인은 직무 배정 동의가 아님]
[정정 요청 권한 개방]
지훈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예린은 기록을 남겼고, 정례는 원본 종이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이 정정이 어떤 법적 효력을 갖는지와 별개로, 지훈의 눈앞에서는 처음으로 닫혀 있던 항목 하나가 열렸다.
[정정 방식 선택]
[1. 118번 오지훈의 대체 동의 철회]
[2. 000번 원칙에 따른 전체 계약 검증 신청]
두 번째 항목 밑에 작은 경고가 붙었다.
[검증 대상: 보유 직무 117건 및 파생 계약 전체]
[검증 중에는 계약 당사자가 직접 거절 의사를 확인해야 함]
[제3자는 당사자 대신 선택할 수 없음]
지훈은 섣불리 누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직업을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다른 사람의 선택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는 화면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먼저 당사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방법을 의논했다.
"한 사람씩 본인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결정이 아니라 준비겠네요."
예린이 말했다.
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부터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각자 선택하게 도와야죠."
그때 백도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지훈은 모두 앞에서 스피커폰을 켜도 되는지 물었고, 참석자들의 동의를 받은 뒤 통화를 연결했다.
"드디어 열었군."
백도식의 목소리는 피곤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000번의 거절란. 그걸 원본에 되살리면 내가 묶어 둔 사람들뿐 아니라, 나한테 붙어 있는 직업까지 확인받게 돼."
"그게 두렵습니까?"
"두렵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오지훈. 내가 마지막 관리자인 줄 알았다면 착각이야. 내가 어떤 계약을 취소할 때마다 다른 지점에 새 계약이 생겼어. 누가 그걸 승인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통화가 끊기기 직전, 지훈의 시야에 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000번 원칙 열람자 추가]
[신규 열람자 수: 1]
[접속 위치: 미확인]
[표시명: 오혜숙]
민규가 지훈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지훈이 겨우 입을 열었다.
"민규 씨. 어머님이…… 방금 어디선가 이 기록을 열람하신 것 같습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사람의 이름이 돌아왔다.
그리고 누군가 지훈의 컴퓨터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118번을 철회하지 마세요. 그 자리가 마지막 거절을 받아 줄 수 있는 자리예요.'
서명은 없었다.
지훈은 화면을 바라봤다. 이제 그가 찾아야 할 것은 다음 계약서가 아니었다.
그 거절을 직접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제2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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