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규는 병원에서 돌아온 뒤 빵집 진열대를 한참 바라봤다.
가게 문을 닫아 둔 사이 유리판을 교체했고, 깨진 곳은 말끔해졌다. 그러나 박 씨는 반죽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순서를 떠올리지 못했다.
"가게가 날 기다릴 필요는 없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철민은 대답 대신 새 앞치마를 건넸다.
"사장님이 결정하셔야죠. 제가 먼저 가게를 차지할 생각 없습니다."
박 씨가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철민은 가게 구석에서 밀가루 포대를 옮기다 멈췄다. 예전 조직에서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은 물건을 모두 날랐을 것이다. 일을 끝내지 않으면 벌금이 붙었고, 먼저 쉬겠다는 말은 버릇없다고 들었다.
"사장님, 이거 다 옮겨야 합니까?"
"오늘은 저 두 포대만. 나머지는 내일 납품 차량 올 때 같이 정리하자."
"알겠습니다."
철민은 포대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쉬어도 된다는 말이 이렇게 어색할 줄은 몰랐다.
박 씨가 계산대에서 그를 지켜보다 말했다.
"난 빵 잘 만드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오래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해. 무리해서 쓰러지면 곤란해."
철민은 물컵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예전엔 무리해야 인정받았는데, 여기선 덜 해야 인정받네요."
"덜 하는 게 아니라 맞게 하는 거지."
박 씨는 오늘의 작업표에 '강철민, 재료 정리 2시간'이라고 적었다. 철민은 누군가 자신의 시간을 이렇게 정확히 적어 주는 것도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오후 강철민은 첫 정식 근무계약서에 서명했다. 근무시간과 급여, 휴게시간이 적혀 있었고, 박 씨가 직접 읽어 줬다. 철민은 한 번 더 내용을 확인한 뒤 천천히 이름을 썼다.
"나도 이제 월급을 제대로 받는 겁니까?"
"그래. 통장으로 주지. 급여 명세도 주고."
철민은 종이를 빤히 바라봤다. 스무 해 가까이 일을 했는데, 자신의 서명을 어디에 왜 하는지 묻고 설명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근무 첫날 철민이 맡은 일은 진열장 청소와 재료 정리였다. 박 씨는 그에게 손님에게 팔 제품을 독자적으로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 반죽과 오븐이 안전하게 돌아가는지 확인하는 훈련은 서서히 진행됐다.
지훈이 내려와 물었다.
"제빵 적성은 어떻습니까?"
"아직 자신 없어요. 그래도 여기에서 제가 돈 받고 일하고 있다는 게 좋습니다."
지훈은 그의 머리 위를 보았다.
[강철민 / 표현 가능 수준 72% → 78%]
[자발적 고용관계 확인]
[과거 직무 강제 배정: 해제 요청 진행 중]
숫자는 천천히 올랐다. 무엇보다 철민의 표정이 달라졌다. 급여가 들어올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같은 날 예린은 윤재광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박 씨의 기술을 대신 쓰던 수행원이었다.
"만날 수 있습니까? 경찰에게도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린은 혼자 만나지 않았다. 지훈과 약속된 상담공간에서 짧게 이야기를 듣고, 민감한 내용은 공식 진술을 권했다.
재광의 손에는 작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처음에는 제가 정말 빵을 잘 굽게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틀쯤 지나니 손이 다른 사람 손 같았어요.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박 사장님이 서명한 외부 용역 계약이 제 계정으로 연결됐습니다. 저는 보상금을 받았고요. 그게 단순 기술 교육인 줄 알았습니다."
지훈은 재광의 정보창을 살폈다.
[윤재광 / 고유 적성: 안전 설비 점검 92.1%]
[임시 사용 직무: 박선규 제빵]
[임시 사용 기한: 00:41:16]
"기한이 보입니다. 마흔한 분 뒤예요."
재광이 창백해졌다.
"그러면 제가 다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까?"
"아니요. 적성이라는 건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께도 본인 기술이 있어요."
지훈은 안전 설비 점검이라는 말을 바로 알려 주지 않았다. 먼저 재광에게 그동안 무엇을 좋아했는지 물었다.
"원래는 건물 점검이 좋았습니다. 사람들 다 나간 뒤 보일러실 돌아보는 시간이요."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죠. 책임질 부분은 따로 확인하시고요."
정해진 시간이 지나자 재광의 눈에 혼란이 스쳤다. 그는 빵 반죽의 순서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안전 점검에 대해 설명할 때는 목소리가 안정됐다. 그날 저녁 박 씨의 표현 가능 수준도 조금 올라갔다.
[박선규 / 제빵 표현 가능 수준 0% → 19%]
[외부 위임: 만료]
[추가 회복 조건: 당사자 확인]
박 씨는 오븐 앞에 섰다. 조심스럽게 온도를 맞춘 뒤 철민을 불렀다.
"오늘은 시험 삼아 작은 반죽 하나만 해 보자. 손님한테 팔 물건은 아니야."
철민은 반죽 그릇을 가져왔다.
"예.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박 씨는 한동안 손을 떨다가 밀가루를 뿌렸다. 오래된 기억이 실밥처럼 조금씩 이어졌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분명했다.
며칠 뒤, 첫 급여가 철민의 통장으로 들어왔다. 정해진 근무일수에 맞춰 계산된 작은 금액이었다. 큰 회사에서 벌던 돈보다 적었다. 그러나 빠져나가는 '충성 벌금'도,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쓸 수 있다는 제한도 없었다.
철민은 통장을 확인하더니 박 씨에게 말했다.
"사장님. 제가 번 돈으로 빵 하나 사도 됩니까?"
"직원 할인은 해 주지."
그는 소보로빵 두 개를 골랐다. 하나는 자신이 먹고, 하나는 어머니 사진 앞에 놓으려고 했다.
빵집 밖으로 나온 철민에게 지훈이 물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이상합니다."
철민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돈이 작은데,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지훈은 그 말이야말로 소개소가 만들어 낸 첫 번째 확실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숫자도 능력도 아닌, 본인이 선택한 노동의 대가.
그러나 퇴근길 지훈의 휴대전화에 백도식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하네. 첫 직원이 월급을 받았다지? 이제 그 월급을 지급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 보게.'
철민의 급여 명세를 확인한 지훈은 눈을 의심했다. 박 씨가 정상적으로 지급했는데도 전산에는 낯선 표기가 함께 생성돼 있었다.
'118번 반환 심사자 승인.'
그의 이름이었다.
제1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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