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 지훈은 공공 기록 보관기관의 작은 열람실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가을비가 내렸다. 맞은편 의자에는 구은정이, 오른쪽에는 나예린이 앉았다. 세 사람의 앞에 놓인 것은 하얀 장갑도, 암호가 적힌 검은 명함도 아니었다. 접수번호와 봉인 상태를 적는 평범한 수불대장이었다.
“원본 봉투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기록 담당자는 투명 보관함을 책상에 올렸다. 봉투의 접힌 가장자리는 누렇게 변했지만 밀봉선에는 훼손 흔적이 없었다. 발송 시점은 0차 실험 종료 직후. 수신인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이의 재심리 담당자’로 적혀 있었다.
“왜 이제야 접수됐습니까?”
예린이 물었다.
“원본은 계속 보관돼 있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진행한 목록 재정리에서 ‘실험 종료’와 ‘이의 종결’이 같은 분류로 묶인 오류가 발견됐고요. 실제 재심리 신청으로 올린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훈은 즉시 메모했다. 봉투가 이제 도착한 게 아니라, 서신의 성격을 이제야 구별한 것이다.
담당자는 계속 말했다.
“서신 속 글을 공개해도 된다는 동의는 없습니다. 오늘은 신청 근거가 있는지, 작성 시점이 기록과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원문 복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린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책상 아래에 넣었다.
“그럼 읽은 내용도 다 발표할 수는 없겠네요.”
“그렇습니다.”
첫 장에는 열 번째 참여자를 가리키는 번호와 짧은 질문이 있었다.
‘나는 검사를 거부했다. 그런데 검사하지 않은 나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배정에 사용될 수 있는가?’
지훈은 숨을 멈췄다. 적성 측정을 거절한 사람의 기록이 동의 추정의 근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은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청인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의도 무효입니까?”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의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오늘 신청인이 그 사람인지 여부는 별개입니다. 역사적 이의의 존재는 검증할 수 있어요. 다만 현재 당사자의 의사를 대신 확인했다고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화면에 알림이 떴다.
[000-0-10 서신: 이의 존재 확인]
[현재 신청인 본인 확인: 미완료]
[자동 종결 권고: 유지]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자동 종결 권고가 남아 있어요.”
예린이 낮게 말했다.
지훈은 화면을 가리켰다.
“이의가 있는지 몰라서가 아니에요. 이의를 처리할 사람을 시스템이 정해 놓았기 때문이죠.”
그 아래에는 이미 익숙한 번호가 있었다.
[대리 검토자: 118번]
지훈은 담당자에게 자신의 이의 신청서를 내밀었다. 이름은 오지훈. 문장에는 단 한 가지 요청만 적었다.
‘나는 이 서신의 작성자가 아니며, 그 사람의 결정을 대신할 권한도 없다. 내 이름을 대리 검토자로 사용하는 근거를 제시해 달라.’
장마처럼 이어진 사건들 속에서 그가 배운 첫 번째 대응은 늘 같았다. 모르는 사람의 답을 대신 쓰지 않는 것.
담당자가 서신 마지막 장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이 문장만은 오늘 검토자들에게 읽을 수 있도록 별도 표시돼 있습니다.”
그가 천천히 읽었다.
“‘누군가 나 대신 끝내려 한다면, 먼저 그 사람이 왜 내 자리를 차지했는지 물어 달라.’”
지훈은 수불대장 옆에 놓인 자신의 신청서를 바라봤다. 서른 해가 넘는 시간 간격을 사이에 두고, 두 문장이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제19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