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일곱 시 사십 분, 새 출발 직업소개소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오지훈은 컴퓨터 화면에 남은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제10 기능: 말소]
[첫 말소 후보: 000번 원칙 원본]
[적용 조건: 장기 미확정]
"장기라는 게 몇 년입니까?"
지훈이 묻자 나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뜬 안내에는 기준 날짜가 없어요. 오래됐다고만 쓰여 있어요. 마음대로 날짜를 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더 위험하죠."
강철민은 빵 상자를 내려놓았다. 아래층 박 씨 빵집은 새벽 반죽 때문에 불을 켜 놓고 있었지만, 철민에게 더 급한 건 그날 저녁의 남은 빵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원본을 지운다고 하면, 저번에 받았던 서류도 없어집니까?"
"어떤 원본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지훈은 수첩을 펼쳤다. 이미 여러 차례 조사한 결과, '000번 원본 기록실'은 한 장소가 아니었다. 인쇄소의 교정 기록, 공석관리재단의 등록 원칙, 운영사의 처리 로그가 각각 다른 곳에 보관돼 있었다. 세 자료는 연결돼 있었지만 하나의 파일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셋을 한꺼번에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반대로 종이 한 장을 보관했다고 전산 정정이 끝난 것도 아니고요."
예린은 구은정에게 현재 화면과 접속 시각을 전송했다. 외부 공개가 아니라 검토 요청이었다. 자신의 컴퓨터가 어떤 정보를 보여 주었는지와 실제 운영사에서 어떤 조치를 했는지는 구별해야 했다.
십 분 뒤 은정의 전화가 왔다.
"운영사에서는 '말소'를 보존 기간이 지난 작업 기록의 정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왜 검증 보류된 기록이 대상인지 설명하지 못했어요. 관련 자료의 보존 요청을 정식으로 넣겠습니다."
"그전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사자가 가진 원본을 함부로 옮기지 마세요. 누가, 언제, 어디에서 보관했는지 남겨야 해요. 오혜숙 씨에게도 먼저 물어야 하고요."
지훈은 통화를 끊고 혜숙의 연락처를 바라봤다. 밤이 깊었다. 그는 긴 메시지를 쓰다가 지웠다. 대신 오전에 통화해도 되는지 짧게 물었다. 혜숙은 몇 분 뒤 답했다.
'내일 아홉 시에 통화합시다. 원본을 지키는 일은 저도 제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날 밤 예린은 운영사 공개 설명서에서 한 항목을 찾아냈다. 시스템의 '미확정 경과일'은 사건이 발생한 때부터 세는 날짜가 아니었다. 가장 오래된 관련 문서의 발행 시각을 기준으로 세고 있었다. 000번 원칙은 수십 년 전의 문서였다.
"이거라면 원칙은 처음부터 장기 미확정이네요."
화면을 다시 열자 예상 처리 상태가 바뀌었다.
[000번 원칙 원본 / 보존 경과: 기준 초과]
[말소 적합성 사전 심사: 통과]
[처리 예약: 내일 오전 9시]
지훈은 혜숙의 메시지를 보았다. 서로 통화하기로 한 시각과 말소 예정 시각이 똑같았다.
그는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아직 밤이었다. 누구에게도 대신 서명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혜숙 대신 원본을 가져올 수도 없었다.
그 대신 그는 내일 아침 혜숙이 자기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16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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