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 나예린은 컴퓨터 앞에 A4 한 장을 놓았다. 몇 시간 전까지 복잡한 표를 만들던 손이 이번에는 아주 짧은 문장을 적고 있었다.
'오지훈은 자신에게 지정된 승계 권한을 수락하지 않는다. 이 의사 표시를 제삼자의 동의로 간주하거나 다른 당사자에게 이전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지훈은 그 문장을 읽었다.
"이것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아뇨. 우리가 이런 뜻으로 말했다는 기록이에요. 시스템이 그 뜻대로 움직일지는 아직 모릅니다."
예린은 그 문장을 정식 이의신청과 구분했다. 하나는 지훈 자신의 의사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와 기관에 '승계 값을 실제 증빙으로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구은정은 문서마다 제출 목적과 대상 범위를 명확히 적게 했다.
"사람들의 모든 권리를 제가 지키겠다고 쓰면 안 되겠네요."
"맞아요. 대리인이 될 권한을 받은 것도 아니니까요."
그때 박선규가 가게 문을 닫고 잠깐 올라왔다. 벽시계 아래에서 빵 봉투를 건네던 그는 서류가 쌓인 책상을 보며 물었다.
"빵집에서 고용계약서 쓸 때도 꼭 이런 걸 해야 하나?"
지훈은 웃었다.
"계약서는 필요하지만, 계약서가 본인 대답을 만들어 주는 건 아니죠."
"그럼 우리 철민 씨한테 좋은 이야기네."
철민은 괜히 빵 봉투를 열었다. 그날 새벽 그는 제빵 기능사 실기 연습을 하다 실패했다. 크림을 넣는 순서가 어긋나 제품의 절반을 폐기했다. 박 씨는 잘못된 순서를 다시 알려 주고, 다음 연습은 철민이 정하도록 했다.
"전엔 제가 실수하면 누가 대신 혼나야 했습니다. 아니면 누군가를 혼냈죠. 지금은 제가 만든 빵이 맛없으면 그냥 제가 고칩니다. 그게 좋아요."
그 말에 지훈은 자신이 적어 둔 오른쪽 칸을 떠올렸다. '당사자만 대답할 일'. 때로는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해 보겠다는 선택도 그 칸에 들어갈 것이다.
구은정이 방문해 비공개 접수 서류를 점검했다. 그녀는 운영사와 자료를 실제 사용하는 기관에 동시에 보낼 확인 요청을 제안했다. 요청 내용은 단순했다. 자동 승계 결과가 본인의 의사 표시나 직무 수행 확인으로 유통되고 있는지, 문제 제기 이후에도 새로운 문서가 발행되는지, 임시 보류가 가능한지 묻는 것이었다.
예린은 직접 자료를 제공한 사람들에게 공유 범위를 다시 확인했다. 조은재는 자신의 사례를 서식 검증에 이용하는 데 동의했고, 서민규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을 붙였다. 정라희는 회사와 발급기관에만 제출해 달라고 했다. 서로 다른 조건은 번거로웠지만, 그 차이를 없애지 않는 것이 이번 일의 핵심이었다.
오후 세 시 반, 전달 완료 표시가 세 곳에서 돌아왔다. 접수 확인과 실제 조치는 다르다는 사실도 지훈은 수첩에 적었다.
그때 황주석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다.
"오 상담사, 아주 근사한 편지를 쓰셨더군요. 그런데 당신이 거절하면 다음 사람은 누가 보호합니까?"
"그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말할 기회를 얻어야겠죠."
"그 사람도 말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남겨야 합니다. 동의했다고 바꾸지 말고요."
황주석은 짧게 웃었다.
"그렇게 하면 세상에 멈춘 일이 너무 많아질 겁니다."
지훈은 창밖을 보았다. 건물 아래 빵집 앞에는 갓 구운 식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박 씨는 주문을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확인했다.
"멈춰서 확인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화면에 새 문구가 나타났다.
[임시 승계 확정까지 03:25:00]
[118번 미수락 시 책임 분산 모드 가동]
예린이 중얼거렸다.
"이제 한 사람에게 넘기지 못하면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겠다는 건가 봐요."
지훈은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들은 아직 이긴 것이 아니었다. 다만 누구의 뜻으로 싸우고 있는지는 분명해졌다.
제15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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