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소개소에 낡은 서류 가방을 든 남자가 찾아왔다. 이름은 이경수. 백도식의 옛 물류회사에서 십오 년 동안 배송 계획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백 회장에게 연락받고 왔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한 것만 말하겠습니다."
경수는 탁자에 종이 두 장을 올렸다. 하나는 퇴사 희망서, 다른 하나는 '잔여 업무 승계 확인서'였다. 첫 장에는 경수가 자필로 쓴 '퇴사를 희망합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둘째 장에는 경수의 후임자로 지정된 다른 직원 이름과 '향후 발생하는 모든 불이익에 대한 동의 완료'라는 문장이 인쇄돼 있었다.
"저는 저 직원한테 아무 부탁도 안 했어요. 그런데 회사가 그 사람이 일할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도 그 사람이 누군지 잘 몰랐습니다."
예린이 생성 날짜를 물었다. 경수는 원본을 직접 보관하지 못해 정확한 날짜는 재확인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기억나는 것은 퇴사 희망서를 작성하고 며칠 뒤 후임자에게 자신이 처리하지 못한 사고 보상 문제가 넘어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제가 서명을 안 하면 못 나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퇴사 자체를 포기했죠."
경수는 서류를 접었다. 지훈은 그가 불편하면 언제든 설명을 멈춰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다시 오셨습니까?"
"요새 우리 아들이 첫 회사를 다닙니다. 퇴근하고 와서 하는 말이 있어요. 선배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고. 거절하면 팀 분위기를 망친대요. 제가 예전에 겪던 일이 그대로 돌아온 것 같아서요."
경수의 아들은 회사 이야기가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훈은 아들의 이름과 직장을 적지 않았다. 상담을 신청한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을 이유가 없었다.
구은정은 경수가 동의한 범위에서 서류의 양식을 비교했다. '잔여 업무 승계 확인서'의 서식 번호 끝에는 09가 있었다. 백도식이 가져온 인쇄물과 같은 계열이었다. 두 서류가 같은 시스템의 산물인지는 아직 더 살펴야 했지만, 적어도 서로 다른 시기에 같은 논리가 사용됐다는 단서는 되었다.
"업무 인계가 필요하다는 건 맞습니다."
은정이 말했다.
"다만 일을 계속할 조직이 어떻게 처리할지의 문제와, 떠나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했는지의 문제는 구별해야죠."
라희에게도 전화가 왔다. 청원물류는 은하의 퇴사 표시를 일단 '검증 중'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공식 정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분간 현장 안전 확인은 자격을 갖춘 근무자가 직접 맡고, 라희는 자신이 선택한 출고 업무를 계속할 예정이었다.
"은하 선배가 돌아오시면 제가 먼저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선배 자리 빼앗지 않았다고요. 아니, 빼앗는 걸 거절했다고요."
지훈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씀은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하세요. 은하 씨가 들으실 준비가 된 때에요."
경수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퇴사 희망서 사본을 가리켰다.
"제일 어려웠던 건 서명하는 일이 아니었어요. 내가 그만두겠다는 말을 남이 다른 뜻으로 읽는 걸 견디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떠난 뒤 예린이 긴급 통지를 띄웠다.
[제9 기능 / 순차 승계 대상 예고]
[118번 미수락 시: 연관도 차순위 자동 선정]
[차순위 후보: 검증 관련 접촉자]
이제 문제는 지훈 혼자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시스템은 누군가가 거절할 때마다, 그 거절 때문에 가장 많이 움직인 사람에게 다음 차례를 넘기려 하고 있었다.
제15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