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판의 뒷면에는 숫자 하나가 적혀 있었다.
8.
오지훈은 판을 바로 만지지 않았다. 나예린이 먼저 포장 사진을 남기고, 누가 보낸 것인지 확인 가능한 정보를 찾았다. 발신인은 비어 있었고 배송 의뢰처에는 '원천관리계정 지정 통보'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
"또 기능 이름을 바꿔서 돌아온 걸까요?"
예린의 물음에 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번엔 합의, 이번엔 대체였죠. 하지만 일단 내용부터 확인합시다."
구은정은 금속판의 문구와 이전 설명회 자료를 비교했다. 공개 자료에는 일자리 공백을 메우는 기술만 소개돼 있었다. 누가 그 일을 했는지 증명하는 절차까지 시스템이 대신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날 오전 강철민이 빵집에서 작은 실수를 했다. 소금빵 열두 개를 굽는데 유산지를 잘못 깔아 두 개의 바닥이 눌어붙었다. 철민이 박선규에게 말했다.
"제가 잘못 깔았습니다. 두 개는 판매하지 않겠습니다."
박 씨는 반죽부터 다시 확인하자며 철민과 함께 오븐 옆에 섰다. 누구도 실패한 빵의 책임을 다른 직원에게 돌리지 않았다. 지훈은 두 사람이 나누는 짧은 대화를 들으며 출근했다. 책임을 지는 말은 거창한 서류가 아니었다. 자신이 한 일을 정확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있게 남기는 행동이었다.
오후에는 서민규가 승급 심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결과 발표는 아직이었지만 표정은 홀가분했다.
"원본 작업일지를 직접 설명했습니다. 왜 그때 가동 보류를 요청했는지도요. 심사위원이 제 판단을 물어봤습니다. 숫자가 아니라요."
"잘하셨습니다."
"태욱 선배는 재교육 신청서를 냈대요. 병원도 계속 다니고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와 태욱의 갈등을 해결했다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자기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일이 소개소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때 한시온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래전에 사람들의 지워진 거절을 들을 수 있다고 했던 소년이었다. 지훈은 미성년자인 시온의 이야기를 혼자 판단하지 않고 보호자의 참여를 먼저 확인했다. 시온은 직접 만나는 대신 짧은 음성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아저씨, 이번에는 거절한 말이 아니라 이상한 확인 문장이 들려요."
"어떤 문장인데?"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라는 말이요. 그런데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녹음된 것 같지도 않고요. 그냥 누가 확인했다고 써 놓은 느낌이에요."
예린은 시온의 말을 증거로 단정하지 않고, 그에게 더 찾아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3,505건 가운데 검증되지 않은 기록의 표시가 어떻게 바뀌는지 운영사에 문의했다. 회신에는 새 기능의 시범 적용 안내가 붙어 있었다.
[원천관리계정 / 제8 기능: 증명]
[목적: 행위자 확인이 어려운 경우, 직무 수행 사실에 대한 대리 증명 제공]
[기준: 연관 데이터의 일치도]
[증명 주체: 자동 선정]
"행위자 확인이 어려운 경우라고요?"
지훈은 중얼거렸다.
"확인할 수 없으면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걸 아는 것처럼 증명하겠다는 거네요."
예린이 추가된 예시 화면을 열었다. 테스트 문서는 몇 년 전 새 출발 직업소개소가 문을 열기 전의 상담 기록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훈이 오래전 참여했던 취업 지원 행사에서 작성됐다는 기록이었다. 그의 서명이 붙은 페이지 아래에는 단정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상담사 오지훈은 118번 권한을 자발적으로 신청하고, 타인의 직업 배정에 대리 서명하는 것에 동의함.'
지훈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그런 서명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보관한 수첩에는 반대되는 문장이 남아 있었다.
'대상자의 선택을 강요하지 말 것.'
"이걸 제가 했다고 증명하겠다는 겁니까?"
구은정이 서류를 살폈다.
"진위를 확인하기 전에는 동의한 사실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원본을 요구하죠."
예린은 화면의 맨 아래에서 한 줄을 더 발견했다.
[제8 기능의 첫 증명 대상: 000번 원칙 폐기 의사]
[원본 작성자: 오혜숙]
[대리 증명자 자동 지정: 오지훈]
누군가 이번에는 지훈에게 오혜숙의 원칙을 폐기했다는 증인이 되라고 하고 있었다. 지훈은 새 출발 직업소개소의 문을 열었다. 오후 햇살이 낡은 의자와 상담 수첩 위로 길게 들어왔다.
그는 오혜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대신 증명했다고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먼저 혜숙 씨가 실제로 하신 말씀부터 확인하고 싶어요."
수화기 너머의 오혜숙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지훈 씨. 그 원칙을 폐기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제 목소리로 그 말을 하고 싶어 했지요."
지훈은 창가에 걸린 종이를 바라봤다. '선택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이 원칙을 지키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증명은 누군가를 대신해 그럴듯한 말을 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을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시스템에는 새 알림이 나타났다.
[제8 기능 / 최초 증명 시각: 내일 오전 9시]
[증명 취소 권한: 원본 당사자 부재 시 자동 소멸]
지훈은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아직 내일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워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제14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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