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욱은 서류를 끝까지 읽고서야 펜을 들었다. 새 복귀 지원안의 제목은 '신속 자격 회복'이었다. 세 사람의 원본을 하나로 묶지 않으면 검토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빨리 일하고 싶은 건 맞습니다."
그는 지훈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걸 쓰면 민규가 해 온 일을 제 것으로 인정하는 거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정확한 효과를 운영사에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럼 안 쓰겠습니다. 대신 복귀를 포기하는 건 아니고요."
지훈은 그 두 문장을 구분해 적었다. 태욱은 당장의 대체 등록을 거절했지만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쉬는 동안에도 복귀 준비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요청한 추가 안전교육 일정은 이미 달력에 표시돼 있었다.
민규는 다른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승급 담당자가 그에게 예외 심사 신청서를 보냈다. 현재 경력 조회가 맞지 않더라도 실제 작업 경험을 별도 확인해 심사에 반영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한 장짜리 신청서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걸 내면 제 잘못이 아니어도 제가 예외가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심사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는 선택입니다. 제출할지는 민규 씨가 결정하세요."
민규는 한 문장씩 읽었다. '경력 원본은 본인이 보유함.' '검증 진행 중에도 기존 업무 수행 기록은 유효함.' 그가 요구하던 내용이었다. 민규는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전산 오류에 대한 이의 제기는 철회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가람은 승진 심사에서 잘못 더해진 두 건의 실적을 빼 달라고 회사에 요청했다. 팀장은 당황했지만 그가 남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지 않겠다고 밝힌 이상 무시하기 어려웠다.
세 사람의 선택은 서로 달랐다. 태욱은 성급한 복귀를 거절했고, 민규는 예외 심사에 응했고, 가람은 부풀려진 실적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모두가 원하는 것은 같았다. 자신이 한 일을 자기 이름으로 남기는 것.
그날 저녁, 서민규는 소개소를 나서다 발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저 어머니 공책 기억하시죠? 예전에 000번은 사람이 아니라 첫 거절 기록이라고 말씀드린 거요."
"기억합니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이 있었어요. 서류는 고칠 수 있지만, 못 했다는 사람을 했다고 만들면 그 사람이 사라진다고요."
"어머니가 이 일과 관계가 있었습니까?"
"그때는 그 말이 인쇄소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하니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수첩 복사본을 지훈에게 건넸다. 서류 여백에 가느다란 글씨가 있었다.
'대체 불가 항목: 행위자의 목격, 실제 숙련, 당사자의 책임.'
지훈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신기한 힘의 비밀을 밝혀 주는 문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해서 아무도 쓰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내가 본 것을 남이 봤다고 할 수 없고, 내 손으로 배운 기술을 화면으로 넘길 수 없고, 내 선택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
그날 밤 예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제가 더 커졌어요. 오늘 검증된 대체 기록이 세 건인데, 연결된 업체 수는 스물여덟 곳입니다."
"모두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같은 규칙을 쓰고 있어요. 게다가 황주석이 '대체의 완성'이라는 설명회를 내일 열겠대요."
지훈은 창밖의 불 꺼진 건물을 바라봤다. 새로운 사업 발표를 막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세 사람의 이름으로 확인된 세 가지 결정을, 누구도 바꿔 쓰지 못하도록 남기는 일이었다.
제13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