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까지 세 시간이 남았다.
오지훈은 서두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백도식의 검은 명함을 처음 봤을 때처럼 무작정 계약서를 찢거나 컴퓨터의 전원을 뽑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채용 기록은 계속 돌아가야 했고, 누군가는 내일 아침 평범하게 출근해야 했다.
구은정은 관련 운영사와 연동 기업에 긴급 중단 요청을 전달했다. 요청 범위는 명확했다. 기존 계약과 정상적인 채용은 유지하고, 당사자 확인 없이 새로 생성되는 '대리 승인'만 멈추자는 것이었다. 기술 검토와 증거 보존도 동시에 요청했다.
나예린은 화면에 세 개의 목록을 띄웠다.
'이미 직접 확인된 응답.'
'실제 의사와 불일치하는 대리 응답.'
'확인되지 않아 보류해야 할 응답.'
"예전에는 전부 예 아니오로 나누고 싶었어요."
예린이 말했다.
"이제는 모르면 모른다고 표시하는 칸이 제일 중요하네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임채원이 들어왔다. 회색 후드티 대신 단정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회사 내부 자료가 아니라, 본인에게 발급된 업무 위임장과 그 철회 접수증이었다.
"제 명의로 남은 대리 권한을 오늘 모두 철회했습니다. 아직 시스템 반영은 확인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더 이상 안내를 하지 않겠다는 기록은 남겼습니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 덧붙였다.
"아라 씨에게는 별도로 사과하고 싶어요. 물론 그분이 만나 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건 그분이 정하시겠죠."
철민은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시고 하세요. 식빵입니다. 오늘은 안 짭니다."
채원이 처음으로 웃었다.
밤 열한 시 삼십 분, 예린이 신호를 확인했다. 일부 협력 업체가 대리 승인 연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세 곳은 전산 담당자의 부재를 이유로 답하지 않았고, 원천관리계정의 예약 작업은 여전히 '대기' 상태였다.
"완전히 막지 못할 수도 있어요."
예린이 말했다.
"그러면 어느 기록이 바뀌었는지 나중에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죠."
지훈은 답했다.
은정의 제안으로 독립된 감사 기록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이름을 함부로 모으지 않고, 각 업체에서 자기 기록의 변경 시각과 실제 승인 근거를 보존하게 했다.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대외적으로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자정 십 분 전, 지훈의 휴대전화에 마지막 교정 문구가 도착했다.
'당신이 책임을 인정하면 이 사태는 끝납니다.'
아래에 선택란 두 개가 있었다.
[책임 인정] [대리 승인 수용]
거절할 칸은 없었다.
지훈은 화면을 보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두 버튼 모두 자신이 말하려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종이에 글씨를 적어 구은정에게 보여 줬다.
'어떤 사람의 의사도 제가 대신 승인할 수 없습니다. 제 이름의 대리 승인도 거부합니다. 각 당사자의 직접 확인 절차를 요구합니다.'
은정은 그 문장을 공식 이의 신청에 첨부했다. 그것으로 시스템의 모든 권한이 즉시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훈 본인이 남긴 문장이 다른 사람의 사과문보다 먼저 정식 기록에 접수됐다.
자정 정각.
예린의 모니터에서 예약 작업 세 건이 차례로 움직였다.
[대리 승인 요청 1 / 당사자 근거 없음 / 보류]
[대리 승인 요청 2 / 직접 응답과 불일치 / 보류]
[대리 승인 요청 3 / 사업자 연동 중지 / 실패]
철민이 숨을 내쉬었다.
"됐습니까?"
"오늘 확인된 세 건은 멈췄어요. 다른 사업자는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예린은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지훈도 잠깐 웃었다. 승리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자동으로 게시된 사과문은 정정 절차가 진행 중이었고, 제5 기능의 원본 관리자는 누구인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임채원이 받은 업무 위임장도 모두 무효 처리됐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창밖으로 첫 새벽 배송차가 지나갈 때, 아라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왔다. 회사 안전교육 수료증이었다. 이름과 개인정보는 가리고, 아래쪽에 그녀가 직접 쓴 메모가 보였다.
'기계를 멈추라고 말할 수 있어서, 나는 이곳에서 일할 수 있다.'
지훈은 오래 바라봤다. 처음 소개소를 열던 날에는 재능이 사람을 구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그 일을 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 먼저라는 걸 알았다.
오전 여섯 시, 박 씨가 빵집 문을 열었다. 철민은 앞치마를 고쳐 맸다. 지훈은 책상 위의 빈 의자를 창가로 조금 옮겼다. 누군가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앉은 사람을 대신 판단하지 않을 자리였다.
그때 구은정에게서 암호화된 검토 문서의 새 목록이 도착했다. 예린은 접근 범위를 확인한 뒤 제목만 지훈에게 읽어 줬다.
[제5 기능 교정: 신규 대리 승인 정지 요청 접수]
[제6 기능: 합의]
[작동 조건: 개별 거절이 다수의 동의와 충돌할 때]
지훈은 '합의'라는 단어를 천천히 읽었다.
사람이 스스로 택하는 길을 존중하려면 서로 의견을 맞춰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한 사람의 거절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예린이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시범 대상: 새 출발 직업소개소 입주 건물 전체]
[합의 예정 안건: 소수의 반대로 공공의 일자리 기회를 중단할 수 있는가]
지훈은 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빵집, 세탁소, 작은 사무실. 모두 각자 다른 일을 하면서 같은 건물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가 그 사람들을 한 번에 하나의 대답으로 묶으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들한테 투표를 시키겠다는 겁니까?"
철민의 물음에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죠."
그가 문을 열었다.
"누가 안건을 만들었고, 누구에게 거절할 자리가 남아 있는지요."
상담실의 작은 종이 울렸다. 첫 손님이 들어왔다.
"저, 여기서 일자리 상담받을 수 있을까요?"
지훈은 웃으며 빈 의자를 가리켰다.
"물론입니다. 원하시면요."
제12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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