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이 재처럼 바스러진 뒤에도 지훈의 손가락에는 검은 가루가 남아 있었다.
그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물이 회색으로 흐르다가 맑아졌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눈앞의 글씨만 달라져 있었다.
[000번 / 최초 계약자]
[다음 열람 대상: 백도식]
[열람 조건: 당사자와의 대면]
"당사자와 대면이라니."
지훈이 중얼거리자 뒤에서 강철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랑요?"
"백도식이요."
철민이 손에서 행주를 떨어뜨렸다.
"그 사람한테 다시 가시게요?"
"찾아가서 싸울 생각은 아닙니다. 제 이름이 들어간 서류를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볼 거예요."
"그놈은 안 알려 줄 겁니다."
"그러면 알려 주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남겨야죠."
지훈은 젖은 손을 닦았다. 이제는 검은 명함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남겨 둔 앞뒤 면과 태식이 보관한 공책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음 날 오전, 소개소에 모인 사람들은 지훈이 본 메시지를 듣고도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화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린은 칠판을 세 구획으로 나눴다.
'직접 확인한 것', '다른 사람이 진술한 것', '추측'.
"이번에도 섞지 말아요. 지훈 씨가 명함에서 본 건 지훈 씨의 경험입니다. 그걸 종이에 옮긴 기록은 있어요. 하지만 이 글씨를 다른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는지는 아직 몰라요."
"제가 거짓말한다는 뜻입니까?"
"아뇨. 진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다루자는 거예요."
철민이 웃었다.
"저 양반은 누굴 믿어도 일단 칸부터 나눕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태식은 공책에서 000이라는 숫자를 찾았다. 일반 직원 번호는 001부터 시작했지만, 오래된 계약서 양식 첫 페이지에는 작게 '기초 권한 000'이라고 쓰여 있었다.
"제가 입사했을 땐 이미 있었어요. 백 회장도 이 부분을 손대지 못했습니다. 양식을 복사할 수는 있어도, 이 칸은 수정이 안 됐거든요."
"누가 만든 겁니까?"
"모릅니다. 원본 문서 작성자는 공란이에요."
예린이 물었다.
"전자 기록에도 공란이었나요?"
"늘요. 회사에서는 그냥 예전 시스템의 오류라고 했습니다."
그때 철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의 표정이 굳었다.
'백 회장'.
철민은 받지 않았다. 곧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철민아. 빵 냄새는 좋으냐? 네가 그쪽에 붙으면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해. 오지훈에게 전해라. 000번은 찾아보지 말라고."
녹음을 다 들은 뒤 누구도 바로 말하지 못했다. 지훈이 물었다.
"이걸 남겨도 될까요?"
"제 전화니까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필요하면 동의하고 제출할게요."
철민은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작게 만들지 않고 대답했다.
점심때 김지연이 소개소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딸의 점퍼를 들고 왔다. 소매 한쪽에 분홍색 실로 작은 별을 더한 참이었다.
"회사에서 어제 연락이 왔어요. 지금 손을 써서 바느질하면 지난번 지급한 지원금을 반납하라네요."
지훈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휴대전화 화면을 바로 돌려줬다.
"지연 씨가 어떤 선택을 원하는지 먼저 듣고 싶어요. 여기서 계속 연습하실 건가요? 아니면 잠깐 쉬시겠습니까?"
지연은 한참 별 모양의 실을 쓰다듬었다.
"겁나지만 계속할래요. 제가 딸한테 약속했거든요. 새 학기 전에 완성해 준다고."
"그러면 연습할 수 있는 자리를 알아봅시다. 돈 문제는 관련 기관에 문의하고요."
그는 지연의 대답을 기록지에 그대로 적었다. '겁나지만 계속할래요.' 이 문장과 계약서에 적힌 '회사 소속을 계속 유지합니다'라는 문장은 전혀 다른 종류의 말이었다. 앞의 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왔고, 뒤의 것은 그 마음을 누군가 대신 정리한 문구였다.
"상담 기록에 제 말을 이렇게 쓰나요?"
"틀렸거나 바꾸고 싶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훈은 그 작은 확인 하나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오후에는 예린이 공개 기업등기와 오래된 채용공고를 정리했다. 미래인력개발의 전신은 스무 해 전 설립된 '다시일터 직업지원센터'였다. 지금과 달리 한때는 폐업 공장 근로자의 재취업을 돕던 단체였다. 대표자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최초 운영위원 명단에는 지워진 항목 하나가 있었다.
'초대 상담책임자: 기재 누락.'
"고의로 지웠다는 증거는 없어요. 자료가 낡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린이 말했다.
지훈은 서류 사본 가장자리에 적힌 손글씨를 보았다. '당사자가 거절하면 상담 종료.'
그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백도식이 운영하는 회사의 어투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지훈은 정식으로 면담 요청서를 작성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생성된 계정과 서명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예린이 문장을 다듬고, 노무사가 검토할 사항은 따로 표시했다.
발송 버튼을 누른 지 칠 분 만에 답장이 왔다.
'면담 승인. 내일 오후 두 시. 미래인력개발 본사 4층.'
마지막 줄은 누구의 이름도 없이 적혀 있었다.
'백도식 회장 본인도 해당 면담에 참석 의무가 있습니다.'
지훈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창이 아닐까 싶어 예린에게 화면을 돌렸다.
"보이죠?"
"네. 이메일에는 그렇게 적혀 있어요."
철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우리 회장한테 참석 의무를 줍니까?"
그 질문에 답한 사람은 없었다.
그 시각, 본사 최상층 집무실에서 백도식은 같은 메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화면을 닫으려다 손을 멈췄다. 컴퓨터에 평소 보이지 않던 항목이 떴기 때문이다.
[000번 권한자 호출]
[피호출자: 백도식]
[출석 거부 시 보유 직무 일시 동결]
백도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살아 있었나."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 표정에 웃음이 없었다.
제1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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