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99화
PAYLUA ORIGINAL · 제99화

99화. 거절할 수 있는 이름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4,682자

오프라인 책장
우리는 아무 문도 열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날 저녁 여섯 시가 되자 구역의 공기가 얇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창문에 맺힌 김이 지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내 손목시계의 초침이 멈췄다. 다른 시계는 각자 다른 숫자를 표시했다. 나는 유나에게 내가 움직이는 게 보이는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너 혼자 아니야." 작은 말이었지만 마음이 놓였다. 처음 시간 정지가 찾아왔을 때 나는 세상에 나 혼자 남은 줄 알았다. 이제는 나를 믿는 사람이 옆에 있었고, 믿지 못하는 부분은 함께 확인하는 법을 배웠다. 서아가 회의실 앞에 섰다. 오늘 심리의 남은 시간은 십삼 분. 증인 식별정보 삭제 예약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긴장감 때문에 목이 말랐지만 물을 마실 생각은 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해도 돼?" 서아가 물었다. "네 시간이야." 유나가 답했다. 심리 화면의 빈 의자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차정수의 이름이 붙지 않았다. 대신 '대리인 확인 실패'라는 문구가 떴다. 우리가 찾은 원본 거절권 때문에 누군가 기록만으로 사람을 출석시키기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서아는 어린 시절 문집에서 복사한 페이지를 꺼냈다. "1998년의 저는 어떤 말을 듣고 무엇을 봤는지 전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기 운영망에 있는 증언이 제 말과 정확히 같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화면에 경고 표시가 켜졌다. [불확실한 증언은 원본 증인 인증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서아가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제 이름을 이 기록에 붙이지 마세요. 그런데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록 자체를 지우지도 마세요." 화면이 잠잠해졌다. 운영망은 그런 요청을 처리하도록 설계되지 않은 듯했다. 증언에 동의하면 사람의 기억을 요구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증인을 삭제했다. '원본은 남기되 신원은 미확인'이라는 상태를 넣을 칸이 없었다. 나는 준비해 온 제안서를 보여 주었다. 격리 시험 환경에서 이미 검증한 상태 전환표였다. 기존 두 상태 사이에 세 번째 상태를 만드는 간단한 설계. 미확인 증언은 별도 봉인하고, 당사자의 동의를 받기 전에는 어떤 사람의 신원에도 연결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시스템이 모르는 걸 모른다고 적으면 안 됩니까?" 내가 말했다. 운영망의 답변은 뜻밖에도 짧았다. [그 상태는 현재 규정에 없습니다.] "그러면 규정을 고쳐야죠." "운영사가 만든 규정을 우리가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어요." 시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맞아요. 그렇지만 시험 환경에서 가능한 대안을 확인했고, 운영사는 왜 안 된다고 하는지 설명할 의무가 있잖아요. 우리가 권한 없이 변경하자는 얘긴 아닙니다." 우리는 법적 효력을 가진 결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운영망의 강제 실행을 일단 멈추고 분쟁을 외부 검토로 넘기자고 요청했다. 기혁 형사는 실제 진행 중인 증거 보존 절차를 설명했다. 서아는 자신의 의사 표시와 현행 장부의 불일치를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낮은 소리가 울렸다. '딸깍.' 9번 계단실의 모형 같은 화면에 파란 도장이 찍혔다. 이어서 작은 안내가 나타났다. [증인 식별정보 삭제 요청: 보류] [미확인 상태 보존 제안: 접수] 나는 환호할 뻔했지만 끝까지 기다렸다. 보류는 완료가 아니었다. 심리 화면 밑에는 '다음 확인 시각: 18:00'이라는 문구가 계속 떠 있었다. 서아는 깊이 숨을 쉬었다. "한 시간만 벌어도 돼. 적어도 내가 모르는 내 이름을 팔아넘기는 일은 막았으니까." 서아의 진술이 끝나자 운영망에서 자잘한 오류 알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류를 두 번 열람했다는 기록, 증인 목록을 읽지 못했다는 경고, 대체 인증서를 요구하는 화면. 마치 프로그램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거, 무한 루프 같지 않아요?" 나는 시우에게 물었다. "비슷해요. 기존 처리 흐름은 확인이 끝나면 다음 상태로 넘어가게 돼 있는데, 지금은 확인을 보류하겠다는 상태가 생겼으니까요." "그럼 저대로 두면 장치가 폭주합니까?" "시험 환경에선 그런 현상은 없었습니다. 실제 장비가 같은지는 계속 관측해야 해요." 나는 신호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어릴 적 컴퓨터가 멈췄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전원 버튼을 누르면 모든 문제가 끝났다. 저장하지 않은 숙제가 날아가는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 안에 실제 사람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지금은 컴퓨터를 꺼서 기록을 지우면 누군가가 어째서 집에 돌아오지 못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서아가 잠깐 화면을 바라보더니 일어났다. 그녀는 운영망 앞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성공시켰다고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쑥 물었다. "문 안에 있던 아이는 어떻게 되지? 우리가 내 이름을 빼면 그 애 목소리가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거 아냐?" "그건 확인해야 해." 내가 말했다. "네 동의 없이 연결된 통로는 끊더라도, 아이의 말은 독립적으로 남겨야 하니까." 우리는 0번 보관실과 연결된 시험 채널을 열었다. 아이에게 지금 안전한지, 오늘 말을 그만하고 싶은지부터 물었다. 작은 화면에 종이배 하나가 떠올랐다. 아이는 직접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도 대답은 분명했다. "오늘은 괜찮아. 큰 소리가 안 나서 좋아." "어떤 큰 소리?" 유나가 물었다. "누구 이름 쓸 거냐고 자꾸 물었어. 내 이름 말고 남 이름. 이제 조용해." 나는 가슴 한쪽이 아팠다. 어른들이 운영하는 장치 안에 있던 아이가 매일 들은 말이 사람 이름을 고르라는 요구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못 알아들은 것도 있으면 알려 줘. 지금은 네가 말하기 싫으면 그만해도 돼." 내가 말했다. 아이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배를 화면 아래로 밀어 놓았다. "시우 형이 어른이 됐어?" "그래. 네가 원하면 나중에 서로 다시 이야기할 수 있어." "그럼 내일은 똑같은 질문 안 했으면 좋겠어. 오늘은 집에 가고 싶어." 나는 그 문장을 적었다. 아이가 돌아갈 장소가 아직 완전히 마련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집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보존하기 위해 서아의 기억을 강제로 꺼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가 직접 말할 수 있었으니까. 유나가 화면을 닫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아이를 장치에서 빼내는 것만이 아니네. 내일이 왔을 때 또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거지." "네." 내가 답했다. "하루에 열 번씩 동의하라는 창이 뜨면 누구든 지쳐서 눌러 버리잖아요. 그걸 동의라고 부르면 안 되겠죠." 서아는 우리 대화를 듣고 조용히 웃었다. 화면에서 자신의 이름이 당장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아이가 직접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 사실이 더 안심되는 것 같았다. 나는 수첩 한 귀퉁이에 오늘의 가장 중요한 문장을 적었다. '질문을 멈출 수 있어야 대답도 자기 것이 된다.' 그 문장이 끝날 무렵, 관측실 책상 한쪽에서 아주 오래된 물건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장치 옆에 놓인 오래된 전화기가 울렸다. 현재 통신망과 연결돼 있지 않은, 1998년 시설에서 떼어 낸 비상 전화기였다. 원래라면 벨이 울릴 수 없었다. 시우가 전자적 접속을 확인했고 이상 신호만 관측됐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것이 실제 통화인지 보관된 녹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가 받아도 되나요?" 내가 물었다. 기혁 형사가 주의사항을 확인하고 녹음 절차를 준비했다. 우리는 녹음 여부를 명확히 표시한 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긴 침묵 뒤에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를 그만 불러라. 그 애가 거절하는 건 틀린 게 아니다." 그 목소리는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버지라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수첩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어머니가 오래전에 해 주셨던 말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손목시계를 수리할 때마다 나사를 하나씩 작은 통에 넣었다고 했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누구세요?" 내가 물었다. "돌아갈 길을 지키던 사람입니다." "그 길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돌려야 해. 원래의 열한 분은 끝나야 한다." 전화기 너머로 오래된 금속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공구 가방을 여는 것 같았다. "그럼 당신은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끝난 시간을 붙잡고 아들을 다시 데려오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집에 갈 아이를 대신 정할 수는 없었다." 내 가슴이 저려 왔다. 이 말이 아버지의 것이라면 나는 이제까지 찾고 싶었던 대답의 일부를 들은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는 마음과 검증 가능한 사실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원본을 확인하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때도 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가 낮게 웃었다. "그래. 잘 배웠구나." 통화가 끊긴 뒤 시우가 연결 기록을 확인했다. 전화기는 아무 곳에도 통신선을 연결하지 않았다. 대신 보관 장치의 1998년 음성 채널에서 동일한 파형이 나타났다. 실시간 인물과 대화한 건지, 질문을 예측해 분기되는 재생 자료인지는 여전히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달랐다. 독립 녹음기에는 '잘 배웠구나'가 남아 있었지만 보관 장치의 재생 로그에는 다른 문장이 기록돼 있었다. '서아가 여섯 시를 만들었다.' 나는 다시 녹음 파일을 들었다. 분명히 그 문장은 없었다. 누군가 원본에 없는 말을 기록의 끝에 붙였다. [제3의 여섯 시: 원본 수정 시도 확인]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9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