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계단, 아래로 네 칸.'
나는 그 말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처음에는 수수께끼 같아서 심장이 뛰었다. 영화라면 주인공이 당장 벽을 부수고 비밀 공간으로 뛰어 들어갈 장면이었다. 현실에서는 그런 행동을 하면 가장 먼저 경찰관에게 제지당한다. 다행히 우리 팀에는 실제 경찰관이 있었다.
"잠깐." 남기혁 형사가 말했다. "아래로 네 칸이 실제 계단을 뜻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갑자기 바닥을 뜯어 낼 순 없어요."
"제가 망치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눈빛으로는 이미 들었어요."
유나가 웃었다. 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시설 관리 책임자와 보존 담당자의 협조를 받아 9번 계단실 근처의 옛 도면을 비교했다. '아래로 네 칸'은 물리적인 층계가 아니라 당시 비상 안내판의 네 번째 항목일 수도 있었다. 1998년 사진에서 파란 도장이 찍힌 위치를 확대하자 벽에 번호 네 개가 보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꾸로 적혀 있었다.
"거울로 본 사진일까요?" 서아가 물었다.
"가능합니다. 반전된 이미지를 원본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어요." 시우가 답했다.
우리는 촬영 방향을 따져 위치를 좁혔다. 구태형의 운영사가 관리하던 단말기가 아니라 시설 관리인이 보존 중인 금속 안내판이었다. 그 뒷면에는 얇은 투명 봉투가 붙어 있었다. 봉투는 오래된 나사 아래 눌려 있었다.
담당자가 기록을 남기며 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손바닥만 한 종이와 두 종류의 도장이 있었다. 종이 위 파란 글씨는 선명했다.
'본인의 거절이 있으면 대리 배정 불가.'
아래 빨간 글씨는 조금 번져 있었다.
'이 규칙의 종료 취소 요청을 반려함.'
"이제 알겠어." 서아가 속삭였다.
우리가 그동안 '종료 반려'라고 읽던 문구는 누군가의 퇴근을 막는 명령이 아닐 수 있었다. 오히려 사람을 대신 출근시키지 못하도록 정해 둔 규칙을 없애려는 요청을 거절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요청한 건 뭐였죠?" 내가 물었다.
강문석이 이전 문서를 펼쳤다.
"차정수 씨 명의의 문서는 경로 09의 최종 근무 종료를 요청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발견한 종이에는 그 경로의 거절권을 해제하려는 변경 요청 자체가 반려됐다고 돼 있네요. 서로 다른 요청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친 거네요."
"그럴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 처리 로그를 더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장의 사진을 촬영하고 보관 이력을 정리했다. 놀랍게도 봉투에 적힌 마지막 점검 날짜는 2019년이었다. 구태형의 운영사가 이 지역 장비를 인수하던 해였다. 봉투를 관리한 사람이 누군지는 현재 문서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서아가 낮게 말했다.
"누군가 이걸 알고도 왜 숨겼을까?"
나는 답하지 못했다. 증거를 찾은 기쁨보다 그 종이가 스물여덟 해 동안 제자리에 있었고, 누군가는 매년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빼앗기는 걸 보고도 공개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거웠다.
그때 기혁 형사에게 연락이 왔다. 검증 중인 서버에서 갑자기 '원본 규정 효력 상실'이라는 안내가 떴다는 것이다. 누군가 현장에서 봉투를 찾은 사실을 알고 새 버전의 규정을 적용하려 하고 있었다.
"다시 이름을 바꾸고 있네요." 나는 말했다.
시우가 단말기를 열어 보았다. 그는 전원 버튼이 아니라 감사 로그부터 확인했다. 수정 요청은 한정호의 오래된 관리자 인증서로 서명돼 있었다. 그러나 발급 경로는 2019년 구태형의 위탁망이었다.
"한정호 씨 명의로 또 누가 요청한 거죠?"
"네. 생전에 발급된 문서와 이후 발급된 인증서는 분리해야 합니다. 이번 요청을 한정호 본인의 선택이라고 보면 안 돼요."
기혁 형사가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요청이 들어왔다는 사실과 서명 계정입니다. 누가 실제로 조작했는지는 수사로 확인할 겁니다."
서아는 봉투를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녀가 바랐던 것은 거대한 음모의 범인을 당장 지목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이였던 자신에게 '싫다고 말해도 된다'는 약속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 종이에 내가 직접 서명하지 않아도 내 거절을 인정한다고 돼 있네." 그녀가 말했다.
"맞아.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답했다.
영병원 계단실에서 나온 문서를 보는 동안 서아는 여러 번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장 오래 본 곳은 빨간 도장의 뒷면이었다. 거기에 '취소 요청을 반려함'이라는 잉크가 찍혀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빨간색을 위험의 상징처럼 여겨 왔다. 누군가를 가두고 돌려보내지 않는 무서운 도장. 그런데 원본 규칙에서는 다른 뜻이었을 수 있었다.
"이상해." 서아가 말했다. "내가 저 색을 무서워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보니 누군가를 지키는 표시일 수도 있잖아."
"색 하나도 누가 어떤 문장에 붙였는지 따라 뜻이 달라지니까."
한시우는 문서의 발급 번호를 조사했다. 봉투 뒷면에는 `WAIT_0`과 유사한 작은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차정수가 남긴 금속판의 것과 같은 체계에서 나온 자료인지 아직 확인할 수 없었지만, 숫자의 나열 순서는 비슷했다.
"이걸 바로 장치에 넣으면 안 되겠죠?" 시우가 말했다.
"당연하죠. 파일 이름이 열쇠처럼 보인다고 실행하면 큰일 납니다."
나는 과거에 실수했던 배포 작업 하나를 떠올렸다. 파일이름에 'final'이라고 적힌 파일을 최종본인 줄 알고 올렸다가 밤새 복구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내 컴퓨터에는 'final2', 'real_final', 'real_final_last' 같은 괴상한 파일이 늘어났었다. 그때는 웃고 넘길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누군가의 생활 전체가 바뀔 수 있었다.
"이런 문서는 차라리 종이인 게 낫네요." 내가 말했다.
"종이도 누가 바꾸면 똑같지." 서아가 답했다. "다만 읽었다는 흔적이 남는 게 다를 뿐이야."
서아는 원본을 더 오래 보고 싶어 했지만 출입 관리자의 안내 시간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한 걸음 물러났다. 원본이 거기에 남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다음 단계는 우리 마음대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출처를 지키는 일이었다.
기혁 형사는 현장에서 확인한 내용을 각자의 진술과 구분해 작성했다. 우리는 서류가 발견된 위치를 말할 수 있지만, 1998년에 누가 그곳에 넣었는지는 모른다. 2019년 마지막 점검 날짜는 보이지만, 그때 봉투를 실제로 열었는지는 모른다. 한정호 인증서로 새 요청이 들어온 건 확인했지만 실제 조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렇게 쓰고 나자 문서가 갑자기 작게 느껴졌다. 비밀 조직의 모든 죄를 증명하는 폭탄 같은 자료가 아니라, 많은 질문 가운데 몇 가지에 답하는 종이 한 장.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 무언가 대단한 정답이라고 꾸며 놓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물건이었다.
서아가 문서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희미하게 지워진 글씨가 있었다. '반려에 대한 이의는 당사자가 성인이 된 후 직접 신청 가능.' 그녀는 그 문장을 보고 한참 웃었다.
"그럼 그 아이가 정말 나라면, 내가 이제 어른이 됐다는 사실이 중요하겠네."
"그렇지. 지금의 네가 원하면 원문을 읽어 보고 이의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
"원하지 않으면?"
"그냥 두면 되지. 어릴 때 누가 만들었든 네 인생의 모든 결정이 그 종이에서 끝나지는 않으니까."
서아가 팔짱을 풀었다. 처음 계단실에 들어왔을 때 꽉 움켜쥐고 있던 수첩도 가방에 넣었다. 내게 그 변화는 어떤 인증 완료 메시지보다 분명해 보였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출입구로 나왔다. 해가 저물고 있었고 밖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시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누가 퇴근할지 세상이 대신 정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자기 하루를 정리하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나는 그 광경이 이제껏 본 어떤 초능력보다 놀라웠다.
우리는 발견된 종이를 심리 증거로 제출했다. 원본은 원래 보관 장소의 담당자가 관리했고, 우리 팀은 검증 가능한 복사본과 출처 정보만 확보했다. 화면에 제출 완료 표시가 떴다.
[거부권 원본 보존 요청 접수]
[비상 대리 지정 보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서아와 내 이름을 마음대로 번갈아 넣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곧 다음 경고가 올라왔다.
[기한 내 증인 식별정보를 확정하지 못하면 보관 기간의 책임은 최초 보관자로 귀속됩니다.]
[최초 보관자: 차정수]
"이제 아버지한테 넘기겠다고요?"
서아가 내 손목을 잡았다. 우리는 같은 버튼을 바라봤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협박이었다. 너희가 동의하지 않으면 네가 아끼는 사람이 대신 다친다는 말.
나는 손을 떼고 말했다.
"저런 문장을 만든 쪽이 책임져야죠. 사람이 싫다고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인질로 삼을 수는 없어요."
남기혁 형사가 수첩을 덮었다.
"그 문장도 증거로 남깁시다. 저희가 확인할 수 있는 법적 절차와 운영사 책임은 별도로 검토하겠습니다."
모두가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 빈 방화문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낡은 철판을 누군가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똑. 똑.
이번에는 세 번이 아니었다.
"도겸아." 서아가 말했다. "문 안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누가 우리 쪽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아."
제9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