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아버지의 이름이 뜨자 나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차정수.
어릴 때 아버지가 쓰던 공구통에는 이름이 적힌 낡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검은 펜으로 큼지막하게 적힌 두 글자. 그 이름을 수백 번 보고 자랐지만, 지금은 운영망의 차가운 글씨로만 마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동의한 적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그걸 확인할 수 있습니까?" 가상 회의실의 안내 음성이 물었다.
"지금 동의한 기록을 보여 달라고 해야 하는 쪽은 당신들 아닙니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화면에는 '동의 인증 중'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러나 인증이 끝나기도 전에 서아가 손을 들었다.
"제 심리예요. 차정수 씨가 반대 당사자라면 본인 확인부터 하죠."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들렸다.
"그분은 제 계약에 직접 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열람한 설명서와 나중에 바뀐 설명서의 차이를 먼저 확인해 주세요."
운영망은 새 창을 띄웠다. 수정된 부속 설명서가 먼저 나왔다. 서아는 그 문서의 표제를 읽지 않고 하단의 버전 정보를 가리켰다.
"이건 제가 읽은 파일이 아니에요. 여기 작성일이 제가 서명한 날보다 뒤예요."
나는 옆에서 그녀가 미리 준비한 기록을 확인했다. 보존된 열람 화면, 서명 시각, 당시의 파일 식별값. 서아가 나를 대신 증언자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적었다.
[수탁 계약 부속 문서 간 버전 불일치 감지]
[심리 판단 유보]
"유보면 되겠네."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시스템은 곧 다른 길을 찾았다.
[운영대리인 차정수의 동의 기록을 호출합니다.]
회의실 벽에 낡은 영상이 재생됐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얼굴은 희미했고 왼쪽 손에 공구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입 모양까지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서아의 기록을 유지하는 데 동의합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문장을 듣고 서아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보관이라고도, 양도라고도 안 적혀 있잖아요. 뭘 유지한다는 거죠?"
나는 영상의 배경에서 벽시계를 확인했다. 18:11. 아버지가 최초 보관자로 기록된 그 시각이었다. 그러나 화면 아래 표시된 촬영 날짜는 2019년이었다.
"1998년 영상이 2019년에 촬영됐다고요?" 내가 물었다.
시우가 대답했다.
"2019년에 옛 파일을 영상 포맷으로 변환한 기록일 수 있습니다. 날짜만으로 조작이라 단정할 순 없어요. 다만 원본이 아니란 건 맞습니다."
서아가 질문했다.
"영상 속 사람이 동의한 문장의 전체 앞뒤를 보여 주세요."
화면이 멈췄다. 안내 음성이 말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원문을 공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짧게 웃었다.
"사람의 기억을 전부 가져가겠다는 데 동의했다는 건 보여 주면서, 그 근거인 문장은 개인정보라서 못 보여 준다고요?"
심리 화면에 오렌지색 경고가 켜졌다. 발언 방식을 주의하라는 안내였다. 나는 경고가 싫어서 입을 다문 게 아니었다. 서아가 아직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자료는 제 동의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차정수 씨가 실제로 지금 이 심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도 증명하지 못해요."
그 순간 가상 회의실의 '운영대리인' 자리에서 사람 형상이 사라졌다. 빈 의자만 남았다.
[운영대리인 실시간 출석 인증 실패]
남기혁 형사가 조용히 말했다.
"기록과 당사자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지금 누군가 영상 파일로 사람 하나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심리 진행을 멈출 수 있을까 싶었지만, 운영망은 아직 끝내려 하지 않았다.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차정수 보관 시각을 직접 연결하면 실시간 본인 인증이 가능합니다.]
[연결 시 보관 구간이 현재 시각에 병합됩니다.]
"병합하면 뭐가 되는데요?" 유나가 물었다.
시우는 빠르게 설명서를 뒤졌다.
"알 수 없습니다. 오래된 잔상을 재생할 수도 있고, 장치에 남은 사람의 상태를 현재와 이어 보려 할 수도 있어요. 부작용 기록이 없어서 실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 욕심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마음을 이용해 서아의 기억을 요구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은 연결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유로 그분에게 어떤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 일을 하지 않을래요."
운영망의 안내가 잠깐 끊겼다. 그 사이 한시우가 다른 장치에서 감지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가상 회의실과 별도로, 9번 계단실에서 예전의 파란 도장 로그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비상 경로 09 / 현장 발화 전달 시도]
[전달 대상: 제3 증인 심리실]
"누가 말을 걸고 있네요." 시우가 말했다.
기혁 형사는 외부 통로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별도로 녹음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우리는 실시간 출석 화면을 열지 않고 음성의 출처만 감지하도록 설정했다.
차정수의 이름을 내려놓지 못하는 내 마음은 자꾸 화면 쪽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정말 돌아올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내줄 수 있을까. 조금 전까지는 누구도 대신 선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이름이 등장하자 내 원칙이 흔들렸다. 사람들이 가족을 인질로 삼는 이유가 이해돼 버려서 화가 났다.
"도겸아." 유나가 내 옆에 섰다. "지금 네가 어떤 마음인지 말해도 돼."
"아버지라면 좋겠어요. 아무 근거 없는 영상이어도 아버지 목소리였으면 좋겠고요."
"그럼 그렇게 말해. 하지만 그 마음 때문에 서아의 동의가 필요 없는 건 아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꺼내고 나니 조금 부끄러웠다. 누군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와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나 역시 형편없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인정해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희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손에 기름 냄새가 나던 건 기억나요. 철물점에서 사 온 나사를 한 알씩 통에 넣던 것도요. 그 사소한 것들은 안 지워졌거든요."
서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분이 살아 계시든 기록으로 남았든,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바뀌지 않아."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었다. 서아가 내 과거를 대신 해석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 품은 마음을 그대로 들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우는 오래된 영상의 영상과 음성을 분리해 검사했다. 영상의 화질은 여러 번 변환한 파일치고는 일정했고, 목소리의 일부 자음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그렇다고 합성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었다. 오디오 복원 과정에서 특정 주파수를 강조하면 그런 현상이 생길 수 있었다.
"실제로 누가 말했는지보다 먼저, 언제 어떤 파일로 보존됐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시우가 말했다.
남기혁 형사는 별도의 원본 확인 요청을 남겼다. 운영망이 제공한 사진 속 아버지 이름이 실시간 출석 인증으로 쓰이는 것은 막았지만, 누군가 정식으로 그 영상을 제출했다면 출처를 추적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는 누가 어떤 승인으로 그 파일을 끌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법적 효력은 추후 따질 문제고, 지금 심리에서 필요한 건 서아 씨의 권리가 유지되는지입니다." 형사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집중했다.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일과 서아의 동의를 지키는 일은 관련돼 있지만 같은 절차는 아니었다. 하나를 알아내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서아는 새 종이에 자신의 입장을 적었다. '차정수 씨를 심리 당사자로 지정하는 근거를 보지 못했다. 본인이 확인되지 않은 영상은 제 동의 자료가 아니다.' 문장을 쓰고 나서야 그녀가 나를 봤다.
"네 아버지 이름을 이렇게 써도 괜찮아?"
"응. 그게 아버지한테도 맞는 일이야. 아무도 확인 못 한 얼굴로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말을 시키면 안 되니까."
서아는 안심한 듯 펜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 앞에서 초등학교 때처럼 필통을 뒤지며 시간을 끌고 싶어졌다. 어려운 문제를 모두 피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때는 어른들이 대신 정해 주는 줄 알았겠지.
스피커에서 쉰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의자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 일이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다. 그 이름 하나 때문에 실제 사람 셋이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운영망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스피커에서 쉰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남긴 건 동의가 아닙니다. 거절해도 된다는 기록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무심코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 기록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홉 번째 계단, 아래로 네 칸. 파란 도장 밑에 빨간 도장이 있어요. 빨간 걸 뒤집어 보세요."
음성이 끝나자 화면에는 '비정상 연결' 경고가 나타났다. 심리실의 시간이 18:00:00으로 고정됐다.
서아는 조용히 내 팔을 붙잡았다.
"도겸아. 저게 정말 아버지 목소리라면, 왜 서명을 요구하지 않고 기록을 찾으라고 했을까?"
"아버지도 우리가 남의 말을 대신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세 번째 구간의 검은 사각형 안에서 처음으로 파란 표시가 점멸했다.
[거부권 원본 탐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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