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95화
PAYLUA ORIGINAL · 제95화

95화. 세 번째 시계를 그린 아이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4,664자

오프라인 책장
어린아이의 크레파스 그림에 '돌려줘'라고 쓰여 있었다. 누군가 시간을 빼앗았다. 이십팔 년 동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무엇을 돌려 달라는 말일까. 기억인지, 시간을 멈추기 전의 하루인지, 아니면 집에 돌아가기로 했던 약속인지. "확실한 건 아이가 직접 그렸다는 것도 아직 모른다는 거예요." 나는 먼저 말했다. 유나가 웃었다. "이제 네가 먼저 그런 말을 하네." "하도 틀리니까 배웠죠." 기혁 형사는 소아과 대기실 문서의 현장 열람이 허가됐다고 연락했다. 이번에는 서아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나는 그 결정을 존중했다. 함께 가도 되는지 묻자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병원 소아과 대기실은 이제 작은 물품 보관소였다. 장난감과 의자는 이미 없었고, 벽에는 오래된 동물 그림의 색이 옅게 남아 있었다. 벽의 코끼리 한 마리는 코가 두 개처럼 보였다. 내가 그걸 가리키자 서아가 말했다. "예전에 누가 저 코끼리를 보고 두 번 숨 쉬는 코끼리라고 했어." "내가?" "글쎄. 너라면 그런 농담을 했을 것 같긴 해." "그땐 개발자도 아니었는데 벌써 중복 처리에 관심이 있었나 보네." 서아는 웃었지만 곧 그림에서 눈을 떼었다. 그녀는 이 방에서 무엇을 떠올리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결론으로 곧장 연결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보존 담당자가 네 장의 문서를 열람대에 놓았다. 첫 장은 비상 대피자 목록, 둘째 장은 보호자 연락 기록, 셋째 장은 아동 진술 보존표, 넷째 장은 '증인 보류 합의'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가 찾던 바로 그 문서였다. 서명 칸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대신 아래에 남자 어른의 글씨가 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원본 발화를 고정하되, 당사자의 서면 동의 전에는 증인으로 임명하지 않는다.' "당사자 동의 전에는 임명하지 않는다." 서아가 천천히 반복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운영망의 명령과 정반대였다. 현행 장부는 서아가 이미 증인이라는 가정 아래 그녀의 기억을 요구하고 있었다. 처음 문서는 그걸 금지하고 있었다. "이걸 작성한 사람은 누구죠?" 남 형사가 물었다. "보존 자료에는 이름이 일부 훼손돼 있습니다. 다른 근무 기록과 필체를 대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서아는 자기 앞에 놓인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그래도 이 문장은 확실하네. 내가 어른이 돼서 원치 않는다면 증인이 아니라고." 나는 그 말이 그날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아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러 왔지만, 먼저 찾은 건 그 기억을 함부로 가져갈 수 없다는 약속이었다. 그때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방 바깥쪽, 어른들이 서류를 보느라 신경 쓰지 않던 창문 아래였다. 오래된 나무 몰딩에서 종이가 미끄러져 나왔다. 시설 담당자가 확인하고 허락한 뒤 조심스럽게 꺼내 보니, 벽지 틈에 접힌 종이배가 끼어 있었다. 진짜 종이였다. 풀로 붙어 있던 모서리가 낡아 떨어진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유치원 크레파스로 쓴 문장이 있었다. '내가 보고 있었다고 말하면 도겸이가 혼날까 봐.' 서아의 얼굴이 굳었다. "나, 이 말은 기억나." "어떤 상황이었어?"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누가 시킨 건 아니었어. 내가 스스로 무서워서 말을 안 했던 것 같아." 그녀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사고가 났을 때 내가 뭔가를 봤나 봐. 그런데 도겸이가 벌을 받을까 봐." "어린 네가 그랬다면, 그건 어른들이 풀어야 할 일이었어." 유나가 말했다. 나는 종이배를 만지지 않았다. 어릴 때 서아가 누구를 위해 어떤 말을 삼켰는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아이에게 사건의 책임을 지우는 구조라면 그 자체를 먼저 바로잡아야 했다.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사무용 가방을 든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당시 소아과 간호사였던 백현옥이라고 소개했다. 남 형사와 사전 연락을 하고 자발적으로 왔다고 했다. "어린 서아를 기억하십니까?" 형사가 물었다. 여성은 서아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닮았네요. 다만 오래전이라 자신 없어요. 아이가 세 번째 시계를 그리던 건 기억합니다. 그날 시간이 멈췄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았어요. 정전 때문에 시계가 고장 난 줄 알았죠." "세 번째 시계는 왜 그렸대요?" 내가 물었다. "아이는 시계 두 개가 싸웠다고 했어요. 하나는 집에 가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안 된다고 하고. 그래서 아이가 세 번째 시계를 그리면서 말했어요. '이건 내가 정할래요.'" 서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종이를 펼쳐 놓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제가 그때 뭘 결정했다고 생각했나요?" 백현옥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대신 가둬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자세한 설명을 들은 건 아니에요. 그날 아이가 너무 무서워해서 그만 물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세 번째 여섯 시'를 달리 보게 했다. 처음부터 시간이 세 번 멈춘 게 아닐지도 몰랐다. 두 개의 상충하는 기록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음'을 남기는 세 번째 칸. 그것이 서아가 그린 시계의 의미일 수 있었다. 백현옥의 증언을 들은 뒤 서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기실 벽에 남아 있는 코끼리 그림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더니, 자기 손목 안쪽을 바라봤다. "어릴 때 시계를 여기 묶어 찼던 것 같아요. 진짜 시계가 아니라 종이로 만든 걸요." 백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를 길게 오려서 손목에 맞춰 줬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아이들끼리 만들었을 수도 있고, 제가 도와줬을 수도 있죠." 서아는 그 대답을 들은 뒤 비로소 웃었다. "제가 찾는 건 그거예요. 내가 모르는 걸 누가 대신 확정하지 않는 거." 백현옥은 조금 부끄러운 듯 손을 모았다. "그때도 아이가 비슷한 말을 했어요. 누가 자꾸 여섯 시가 맞다고 하니까 자기는 여섯 시 십일 분을 기다리겠다고요. 아이들이 숫자를 잘못 이해한 줄 알았어요." "여섯 시 십일 분이요?" 내가 물었다. 그 숫자는 내 아버지의 보관 기록에 남아 있는 시각이었다. 하지만 소아과 직원이 그 숫자를 들었다고 해서 아이가 시간 정지의 비밀을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날 병원 승강기 안내판에도 복구 예상 시각이 적혀 있었을 수 있었다. "그때 벽에 붙은 안내문이 혹시 남아 있을까요?" 시우가 물었다. 담당자는 영병원 폐쇄 당시의 물품 정리 목록을 찾아 주었다. '정전 대피 안내'라고 적힌 파일철이 있었다. 우리는 가능한 범위에서 사본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18:00 장애 발생, 18:11 임시 출구 개방'이라는 손글씨 메모가 있었다. 18:11은 실제로 그날 직원들이 보았던 숫자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이에게는 그냥 출구가 열리는 시간이었겠네요." 서아가 말했다. "그럴 수 있지." 내가 답했다. "그런데 왜 세 번째 시계를 그렸을까?" 그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백현옥은 잠시 생각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날 한 아이가 '나가면 내가 본 걸 다 잊을까?' 하고 물은 것 같아요. 그걸 듣고 서아라는 아이가 '그럼 내가 적을게'라고 대답했을 수도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섞였을까 봐 걱정되네요." 서아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확신이 없는 증언도 확신이 없다는 말과 함께 남겨 주면 언젠가 다른 기록과 대조할 수 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사고 현장에 아이가 여럿 있었을 가능성을 다시 생각했다. 그런데 문서가 지우려는 것은 왜 단 한 명의 증인뿐일까. 서아는 자신의 글씨로 현장 메모를 정리했다. '여섯 시 십일 분을 기다리겠다는 어린 진술. 기억 출처 미확정.' 마침표를 찍는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자신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반드시 옛날 기억을 되찾아야만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다릴지 정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했다. 그제야 우리는 네 번째 문서의 하단에 쓰인 작고 희미한 숫자를 발견했다. 011. 나는 아버지가 숨긴 WAIT_0 금속판의 숫자를 떠올렸다. 아직 연결할 수 없지만 우연히 같다고 넘기기에도 아까운 단서였다. 우리는 원본에 손대지 않고 메모만 남겼다. "이것도 다음에 조사하자." 서아가 말했다. "그래. 오늘은 네가 알아내고 싶은 걸 먼저 확인했으니까." 서아는 마지막으로 소아과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창가에 있던 오래된 의자는 사라졌지만, 벽의 코끼리는 그대로였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바뀌어도 낡은 벽화 하나쯤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행스러웠다. 귀가하려는데 백현옥이 우리를 다시 불렀다. "그날 제가 한 가지 잘못한 게 있어요. 아이가 그 종이를 달라고 했는데 돌려주지 못했어요. 제가 가진 게 아니라 병원 기록으로 넘어갔거든요." 그녀는 서아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어른들은 아이들 말을 보존한다면서, 정작 아이가 그것을 되찾을 방법은 알려 주지 않았어요." 서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찾게 됐으니, 제가 읽어 보고 결정할게요." 그 순간 시우의 휴대전화에 비상 알림이 떴다. 운영망이 방금 조회된 네 번째 문서를 감지했다는 것이다. [증인 보류 합의서 원본 확인] [원본 무효화 심리 자동 개시] [심리 개시까지 24시간] "원본을 찾자마자 무효로 만들려 한다고?" 나는 말했다. 서아는 내 옆에서 수첩을 닫았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내가 심리에 참석할게. 누가 내 말을 지우려는지 직접 물어보겠어."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5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5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