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하지 않은 대답이 1998년 장부에 적혀 있었다.
[최초 수령 거부 기록자: 차도겸]
[기록 시각: 2026.10.26 18:00]
오늘 저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전 여섯 시 십이 분이었다. 창밖에는 출근 버스들이 평범한 속도로 달렸고, 가게 앞에서는 배달기사가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내 손목시계는 열두 시간 뒤의 일을 이미 완료된 과거처럼 적어 놓았다.
“예언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내가 먼저 말했다.
강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영망이 앞으로 실행할 예정인 요청을 과거 시각에 붙인 것일 수 있어요. 시스템 시계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저한테 결국 거절하게 만들려고 미끼를 놓은 걸 수도 있겠죠.”
유나가 내 앞에 종이를 놓았다. 종이에는 내가 지금까지 직접 한 선택만 적혀 있었다. ‘대리 출근 거절’, ‘미확인 기록 보존’, ‘가족 재배정 반대’. 그녀는 마지막 줄을 비워 두었다.
“오늘 저녁의 대답은 아직 없어.”
“네.”
“그러니까 장부가 뭐라고 쓰든 네가 지금부터 생각해서 정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중에 무엇을 할지는 나도 몰랐다. 그러나 누군가 나 대신 답을 써 놓았다고 해서 그 답이 이미 내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침 여덟 시, 시우는 중앙 운영망의 대체 재정산 예고를 관계 기관과 협조 중인 현장 담당자들에게 전달했다. 내용은 최대한 정확하게 썼다. ‘연결된 장치에서 승인 처리 변경 가능성 확인, 실제 피해 범위는 미확인, 자동 승인 요청이 들어오면 독립 확인 절차를 거칠 것.’
우리는 전국에 설치된 모든 장치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곳에까지 안전하다고 선언할 수는 없었다. 현재 협조 가능한 사업장과 연락 창구에서 확인한 내용만 안내했다.
남 형사는 우리가 확보한 자료 중 조작 가능성이 높은 디지털 기록과 독립된 종이 기록을 분리했다. 한정호의 딸이 제공한 진술서, 장민호가 보관한 숫자판, 아버지 공구함의 인계서, 그리고 운영망의 승인 로그. 각각 어디서 왔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기록했다.
“한 번에 모든 진실을 보여 주고 싶지만, 그럴수록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섞이기 쉽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노트에 적었다. 가장 먼저 중앙 장부의 무단 대리 지정이 실제로 확정되는지 관찰한다. 두 번째로 현장 직원들이 정상적으로 귀가할 수 있도록 기존 수기 절차를 유지한다. 세 번째로 0번 기록의 원래 의미를 기술적으로 구분한다. 네 번째로,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다른 사람의 시간을 대신 내놓지 않는다.
오후 한 시. 어머니가 점심을 들고 왔다. 김밥과 작은 보온병이었다.
“밥은 먹고 해.”
“엄마,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인데요.”
“그래서 더 먹어야지.”
서아가 웃었다. “저희도 먹겠습니다.”
어머니는 사람 수를 확인하고 김밥을 나눠 줬다. 손목시계를 쥔 채 멍하니 있던 내게는 보온병 뚜껑에 담은 따뜻한 국을 건넸다.
“도겸아. 너 아버지를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는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만나고 싶어요. 그런데 누군가 그 마음 때문에 다칠 수 있다면...”
“네 아버지가 너한테 무슨 부탁을 하셨는지 기억나?”
“아니요.”
“나도 다 기억나진 않아. 그래도 하나는 기억해. 너한테 자기 일을 대신하라고 하지는 않았어.”
나는 국을 마셨다. 뜨거웠다. 그 단순한 감각이 나를 현재로 붙들어 주었다.
오후 네 시, 복제 장치의 비교 시험에서 우리가 찾던 차이가 드러났다. 원본 장부의 ‘종료 취소 신청’에는 승인된 수령자가 없었다. 그런데 후대 운영망이 사본을 만들면서 ‘수령 확인 누락’을 ‘수령 기한 초과’로 변환했다. 그때부터 누구든 대리 수령자를 채우면 완료로 처리되는 구조가 생겼다.
“미확인이라는 상태를 시스템에서 허용하지 않았던 게 시작이군요.” 내가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지금은 중앙 운영망의 실제 기록을 직접 고칠 권한이 없어요.” 시우가 답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사실을 입증하고, 협조 장치의 자동 대리 승인 기능을 막는 겁니다.”
서아는 1998년 복사본의 무효 표시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거부 기록을 누가 없앴는지 찾아야 해.”
그날 오후 우리는 뜻밖의 시험 결과를 한 건 더 받았다. 부산의 한 사업장에서 새벽 교대 기록에 대해 직원과 담당자가 서로 다른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중앙 장부가 둘 중 하나를 자동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시 절차에서는 두 사람의 진술을 모두 남기고 근거를 더 확인하도록 했다.
“이러면 일이 오래 걸리지 않나요?” 현장 관리자가 물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틀린 답을 즉시 확정해서 한 사람이 나중에 몇 달씩 증명하게 만드는 것보단 낫습니다.”
관리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 직원이 오늘 일찍 집에 가기로 했는데, 확인이 끝날 때까지 붙잡아 둬야 하나요?”
“아니요.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남기고 예정된 귀가는 진행하세요. 급여나 근무 처리의 정정은 별도로 협의할 수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서아를 보았다. 그녀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왜?”
“예전엔 네가 모든 걸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때는 버그가 있으면 퇴근해도 다시 불려 왔으니까.”
“지금은?”
“버그가 있어도 사람이 집에 가는 법부터 만들고 있지.”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처음 여섯 시가 멈췄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내가 바라던 것은 거창한 능력이 아니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동생과 저녁을 먹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바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유나가 말했다. “처음 네가 시간을 멈춰야 퇴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난 그게 제일 슬펐어.”
“이젠 멈추지 않아도 집에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리고 그게 모든 사람에게 가능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그 말을 수첩에 적고 시계를 찼다. 아직 오늘의 여섯 시는 오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할 시간은 남아 있었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운영망의 대체 재정산 요청이 각 장치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협조 사업장의 장비에서는 당사자 확인 없는 새로운 대리 승인 요청을 거절하고, 현장 담당자가 정상 근무 내역을 별도로 보관했다. 아직 전체 범위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쪽 장비는 준비됐습니다.” 시우가 말했다.
“동생은요?” 유나가 물었다.
“안전해요. 연락도 해 놨어요. 새 봉투가 오면 그대로 보존하고 바로 알려 달라고.”
시계는 17:59:40을 가리켰다.
나는 손목의 금속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후 여섯 시의 정지 장치와 오전 여섯 시의 귀환 장치가 한 화면에 겹쳤다. 9번 계단 영상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열한 번 울렸다.
“지금부터 별관 내부 접근은 중단합니다.” 안전 담당자가 말했다.
우리는 복도 밖 지정된 관측 지점에 머물렀다. 위험을 막는다는 이유로 위험한 곳으로 뛰어드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17:59:59.
모니터의 숫자가 18:00:00으로 넘어갔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이전처럼 모든 사람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창밖의 자동차는 느리게 움직였고, 우리 팀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말을 했다. 하지만 9번 계단 영상 속에서는 흰 병원복을 입은 사람들의 잔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과거의 열한 분이 현재의 여섯 시 위에 포개지고 있었다.
내 손목시계가 문장을 표시했다.
[0번 직원 수령 최종 확인]
[수령 / 대리 지정 / 원본 보존]
이번에는 세 번째 선택지가 있었다. 이전에는 없던 선택지였다.
“누가 만든 거죠?” 내가 물었다.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쪽 복제본에서 제안한 항목과 이름이 같지만, 중앙 운영망에 우리가 적용한 건 아니에요. 어떤 경로로 추가됐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는 ‘원본 보존’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버튼을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빚진 시간을 인계받기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넘길 생각도 없었다.
“선택하기 전에 묻겠습니다.” 나는 시계를 향해 말했다. “보존을 선택하면 누구의 시간이 사라집니까?”
시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본 보존이 실제로 무엇을 보존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어떤 승인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세 버튼을 모두 누르지 않았다. 대신 현재의 내 의사를 수첩에 적고 시계 앞에서 읽었다.
“차도겸은 1998년의 보관 시각을 수령하거나 타인에게 대리 배정하는 데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제 이름으로 바꾸는 데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서아와 유나는 내가 읽은 문장이 녹음됐는지 확인했다. 기혁 형사 역시 독립 기록을 보존했다. 그때 스스로 바뀌지 않던 시계 화면이 한 번 흔들렸다.
[현재 의사 진술 접수]
[자동 수령 처리 보류]
[중앙망 대리 승인 재시도 일시 중단]
시우가 자신의 장비를 확인했다. 협조 중인 곳에서 추가 자동 대리 승인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망 전체가 중단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우리가 숨을 돌리는 동안에도 연락이 되지 않는 곳은 남아 있었다.
“일단 여기서는 막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네. 여기서는요.”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오늘 오후 여섯 시에 다른 사람의 시간을 마음대로 갖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9번 계단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오래된 병원 벽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복도의 불빛도 안정됐다. 관측 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0번 직원 기록 처리: 본인 거부로 보류]
[최초 보관실 구조 담당자 기록: 공개 대기]
“최초 담당자?” 유나가 말했다.
화면 한쪽에 1998년 당시의 직원 사진이 떠올랐다. 남자는 작업복 차림이었고 한 손에 금속 시계를 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 뒤에서 숨을 삼켰다.
“정수 씨.”
사진 아래에는 차정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밑에 새 문장이 이어졌다.
[최초 보관자: 차정수]
[귀환 요청 상태: 접수되지 않음]
[현재 보관 시각: 1998.06.13 18:11]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의 시간이 1998년 열여덟 시 십일 분에 남아 있다면, 그 후의 세월은 무엇이었을까. 사진 속의 사람은 아버지 본인인지 그때 남긴 기록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경고는 훨씬 분명했다.
[차정수의 보관 시각을 해제하면, 미종료 사고의 최초 관측자가 호출됩니다.]
[호출 대상: 0번의 증인]
[이름: 진서아]
서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잠깐.”
그녀는 자신의 수첩을 펼쳤다. 맨 앞장에 적힌 문장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겸아. 이거 내가 쓴 글씨야.”
나는 수첩을 보았다.
‘그날 여섯 시에 도겸이가 오기 전, 내가 먼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서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과거의 관측자였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누군가 우리가 여기까지 올 것을 알고 그녀의 이름을 또 쓰고 있는 걸까.
그때 서아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겸아.”
“왜?”
“지금 여섯 시가 몇 번 울렸어?”
나는 시계를 올려다봤다.
18:00:00.
18:00:00.
18:00:00.
세 개의 여섯 시가 나란히 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가, 멈춘 복도 끝에서 천천히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제9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