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9화
PAYLUA ORIGINAL · 제9화

9화. 서아가 남긴 일곱 문장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172자

오프라인 책장
일요일 새벽, 내가 처음 한 일은 수첩을 펼치는 것이었다. 어제의 기억은 예상대로 사라졌다. 오유나와 대학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날. 어렴풋한 장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 것을 마지막으로 기억했다. 놀랍게도 내가 지워진 기억이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남아 있었다. 나는 여섯 개의 잃어버린 기억을 목록으로 적었다. 월요일 — 어머니의 목소리. 화요일 — 열 살 바닷가. 수요일 — 열여섯 살 생일. 목요일 — 아버지와 마지막 악수. 금요일 — 아버지 얼굴을 처음 그린 날. 토요일 — 오유나와 처음 만난 날. 어떤 기억은 남들이 보기에 작은 것이었다. 어떤 기억은 내가 살아온 이유에 가까웠다. 지워지는 순서에 일관성은 없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첩 앞쪽에 굵은 글씨로 새 규칙을 적었다. ‘지워진 것은 사실이 아니라 경험이다. 사실을 다시 배운다고 해서 경험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이 생각이 옳다면 보관국이 기억을 훔쳐도 우리가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자료를 모으고 서로의 증언을 확인하면 잊어버린 일들을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기쁨과 슬픔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악수의 온도는 종이에 써 놓는다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손목의 희미한 자국을 만지며 나는 집을 둘러봤다. 냉장고에는 어머니의 반찬이 있고, 책상에는 대학 동기의 사진이 있었고, 옷장에는 오랫동안 입지 않은 졸업식 정장이 있었다. 이 사물들은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거울 앞에서 내 이름을 세 번 말했다. “차도겸. 차도겸. 차도겸.” 거울 속 인간이 웃었다. 나는 일부러 입꼬리를 내렸다. “다음번에는 좀 나은 인생을 살아 보자.” 그런데 말하다 보니 웃겼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른 사람일 수 있다면, 누구에게 다짐해야 할까. 똑같은 얼굴을 한 타인에게 바라는 게 되는 걸까. 그래도 다짐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수첩 맨 앞에 연락처를 세 개 적었다. 어머니, 오유나, 남기혁.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내가 먼저 연락할 수 있는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기록이란 잊지 않기 위해서만 남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찾아올 수 있도록 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책상 위 메모지를 가지런히 정렬했다. 첫 번째는 필기체가 기울어 있었고, 두 번째는 급하게 쓴 듯 획이 끊겨 있었다. 서아가 어딘가에서 이 문장을 쓰고 있다면 그녀도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아닐 것이다. 나는 경고들의 시제를 비교했다. '믿지 마'는 미래, '남긴 날짜'는 과거, '가둔 자'는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순서대로 읽으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을 조심하고, 기록을 남기고, 숨겨진 날짜를 찾아, 믿음의 이유를 의심하고, 다른 나를 만나라는 것. 그 이야기의 결말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어쩌면 서아도 그 결말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책상 위에 종이를 일곱 장 늘어놓았다. 빈 종이 하나에는 앞으로 발견할 문장을 위한 자리를 남겨 두었다. 나머지 종이에는 그동안 수첩과 메일, 전단에서 찾아낸 경고를 옮겨 적었다. 같은 문장을 따로 적어 놓으니 순서가 보였다. 한 장만 보면 경고문이지만 여러 장을 나란히 놓으면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 같았다. 이것을 쓴 사람은 내가 언제 무엇을 잃을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라진 기억 하나하나를 다른 단서로 건너갈 수 있게 다리를 놓은 것 아닐까. 나는 접착테이프로 종이를 벽에 붙였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였다. 창문을 열면 종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움직이는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시간을 빼앗긴 사람에게 움직임이란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종이들을 떼어 내 순서대로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유나가 내 수첩에 경고를 남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필로 남은 경고는 그녀의 필체와 달랐고, 내 필체도 아니었다. 작은 받침을 눌러 쓰는 버릇, 숫자 7에 가운데 획을 긋는 습관. 나는 예전 진서아의 실종 신고서에서 글씨를 찾아 비교했다. 똑같았다. 적어도 서아가 일부 경고를 남긴 사람이라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어떻게? 아마도 내가 돌아오지 못한 시간 안에서. 나는 그동안 쌓인 경고를 읽었다. 첫째. 여섯 시에 누가 말을 걸면 믿지 마. 둘째. 기억은 머릿속에만 두지 마. 셋째. 0613은 진서아가 남긴 날짜야. 넷째. 유나를 믿되, 그 여자가 널 지키려는 이유는 믿지 마. 다섯째. 0번 보관실이 열리면 진짜 차도겸을 만난다. 여섯째. 도망친 자와 가둔 자는 같은 사람이었다. 일곱 번째는 없었다. 그 대신 0613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6월 13일. 달력을 확인하자 정확히 일곱 달 전, 내가 보관소에 처음 들어간 주말이 그 날짜 근처였다. 서류봉투의 발급일도 그 무렵이었다. 혹시 0613이 비밀번호라면 어디에 입력해야 할까. 대학 시절의 외장 하드에 접근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암호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쓰던 암호는 기막힐 정도로 단순했다. 첫 프로젝트의 이름과 숫자 네 자리. 프로그램 개발자가 보안에 가장 무심할 때는 자기 컴퓨터를 잠글 때였다. 드라이브 안에는 서아가 보낸 사진이 있었다. 얼굴은 대부분 흐릿했지만 사진마다 같은 조그만 표시가 보였다. 반쪽짜리 시계 모양의 브로치. 세 사람이 웃고 있는 연구소 사진에도 그 브로치가 있었다. 사진의 메타데이터는 정상인데 얼굴 부분만 수정돼 있었다. 누군가 포토샵을 이용해 지운 게 아니었다. 원본 해시값과 클라우드에 저장된 해시값이 같았다. 애초에 사진이 그렇게 촬영된 것처럼 전 세계의 사본이 바뀐 듯했다. 나는 모니터 옆에 메모를 붙였다. '디지털 원본은 증거가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실종 신고서의 문구도 이상했다. '그는 사라진 사실을 모른 채 나타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실종 신고에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서아는 내가 돌아올 것을 알았다. 내가 돌아오더라도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남긴 단서를 읽는 순서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컴퓨터를 켜고 7개월 전 메일의 헤더를 다시 열었다. SIX-ARCHIVE.LOCAL. 주소는 폐쇄망 도메인이라 외부에서 접근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 PC에 숨겨진 가상 네트워크 설정이 있었다. 누군가 원격 접속용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듯했다. 접속하려 하자 비밀번호 네 자리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0613. 화면이 열렸다. 폴더 세 개가 있었다. MEMORY. RETURN. FIRST_DAY. FIRST_DAY를 열자 동영상 파일이 하나 있었다. 길이 37초. 영상은 7개월 전 회사 지하 서버실에서 촬영된 듯했다. 화면에는 나와 진서아가 있었다. 서아는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흰 셔츠 위에 남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드디어 지워지지 않은 얼굴을 본 것이다. 그녀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도겸아. 네가 이걸 보고 있다면 내 계획의 절반은 성공한 거야.” 영상 속 나는 낡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 “절반이면 나머지 절반은?” 그녀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네가 스스로를 믿는 거.” 카메라가 흔들렸다. 멀리서 경고음이 울렸다. “0번 보관실은 사람을 가두는 곳이 아니야. 그 방은 누군가가 잃어버린 한 시간을 모아서 만든 탈출구야. 하지만 출입 허가를 내는 주체가 바뀌었어. 처음 만든 사람의 서명이 있어야 열 수 있는데, 그 서명을 빼앗겼어.” “누구한테?” 영상 속 내가 물었다. 서아가 대답하려는 순간 전등이 깜박였다. 37초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마지막 프레임에 손글씨 하나가 보였다. '반대편에서 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잡음이 튀었다. 일곱 달 전에 녹음된 목소리가 지금 내 방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마치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사람이 방문만 닫고 나간 듯 생생했다. 나는 영상 속 창문의 먼지까지 보려고 화면을 확대했다. 배경의 모니터에 희미하게 반사된 숫자들이 있었다. 06:13, 00:37, 00:00. 각각 어디에서 보았던 숫자였다. 서로 다른 장소에 남겨진 암호들이 같은 화면 안에 겹쳐져 있었다. 나는 셋을 순서대로 수첩에 옮겼다. 숫자의 뜻을 모두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무작위로 남겨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지나온 장소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파일을 여러 번 재생했다. 서아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내 기억은 텅 비어 있는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기억이 지워져도 상처처럼 남는 모양이었다. 낮에 남기혁 형사를 찾아갔다. 그에게 영상과 실종자 목록을 보여 줬다. “이건 어디서……” “제가 예전에 남긴 파일입니다.” 남 형사는 목록을 훑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남하린. 그는 아내의 이름을 찾아냈다. “살아 있다는 뜻입니까?” “적어도 누군가 기억을 보관하고 있다는 뜻이죠.” 남 형사는 눈을 감았다. 길고 지친 숨이 새어 나왔다. “형사님, 제가 그곳에 들어가면 밖에서 할 일이 필요합니다.” “뭐든 말해요.” “오늘 오후 6시 정각에 저희 회사 지하 서버실 전원을 끊어 주세요. 단, 6시 00분 01초가 되기 전엔 복구하지 말아 주세요.” “시간이 그 사이에 흐르지 않는다고 했죠?” “네. 그러니 바깥에서 할 수 있는 건 전원 차단이 아니라 차단 명령 예약일 겁니다. 정지가 풀리는 순간 전원이 내려가야 해요.” 남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는?” “제가 돌아오면 도망칠 준비를 해 주세요.” 오후 5시 59분, 나는 회사 앞 횡단보도에 섰다. 유나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도블록 틈에 얇은 카드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차도겸. 일곱 번째 기억을 잃으면 너는 나를 더는 찾지 않을 거야. 그래도 문을 열어. — 진서아.’ 그 아래에 작은 문장이 있었다. ‘네가 사라진 첫날, 내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카드를 뒤집었다. ‘너 혼자서는 돌아올 수 없어.’ 6시. 사람들이 멈췄다. 나무문이 나타났다. 손목시계의 숫자 옆에는 붉은 문장이 떠 있었다. [일곱 번째 기억 징수 대상 확인: 진서아와의 약속.] 나는 짧게 웃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걸 가져가는군.”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기억을 빼앗겨도 기록은 남는다. 누군가 내게 다시 알려 주면 된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문 뒤편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오유나. 그녀의 손에는 내가 처음 본 것과 같은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