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내려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다.
유나가 검은 우산을 접었다. 우산 안쪽에는 종잇조각이 수십 장 매달려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적힌 기억 목록이었다. 검은 우산을 든 자들이 사람의 기억을 옮길 때 사용하던 것과 똑같았다.
“놀랄 줄 알았어.”
“징수자였습니까?”
“빌린 거야. 이걸 써야만 0번 보관실의 반대편 문을 볼 수 있어서.”
“유나 씨 말을 이제 어떻게 믿죠?”
그녀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믿지 마. 이번만큼은 네가 결정해.”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누구나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하는데, 유나는 자꾸 믿지 말라고 했다.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이미 몇 번이나 내 믿음을 배신한 사람처럼.
나는 문을 열었다.
안쪽은 병원 복도와 도서관 서가를 억지로 이어 붙인 공간이었다. 벽마다 사람의 이름이 붙었고, 천장에는 아날로그 시계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초침은 전부 오후 6시를 향해 있었다.
“여기가 0번 보관실?”
“입구야. 여기는 누군가가 잃어버린 시간을 저장한 공간. 안쪽에는 시간이 지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첫 번째 문을 통과하자 유리벽 너머로 침대들이 나타났다. 침대마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어느 누구도 늙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떤 사람은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퇴근길 정장 차림이었다.
김태오.
그를 찾았다. 실종 전단에 있던 얼굴 그대로였다. 가슴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 있네요.”
“몸은.”
“그러면 깨어나게 하면 되잖아요.”
유나가 유리벽을 가리켰다. 작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현실 귀환: 원본 기록 확인 후 승인.]
어쩐지 은행 창구에서 신분증을 요구받는 느낌이었다. 다만 고객은 몇 년째 누워 있고 창구 직원은 기억을 수거하는 괴물이었다.
나는 사원증을 꺼냈다. 문 옆 단말기가 켜졌다.
[관리자 차도겸 확인. 원본 기록 없음.]
“원본 기록이 없다니?”
유나가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딱. 딱. 딱.
세 번.
멈춘 골목에서 들었던 신호와 같았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 작은 문 위에는 ‘FIRST_DAY’라고 적혀 있었다.
사원증을 대자 문이 열렸다.
안에는 방이 아니라 사무실이 있었다. 오래된 모니터가 켜져 있었고 창밖으로 7개월 전의 빗속 거리가 보였다. 시계는 6월 13일 오후 5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나였다.
회색 코트를 입고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남자. 금요일 반복되는 1초 동안 봤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나는 한 걸음을 내딛다 멈췄다. 문 안쪽의 공기는 나와 다르게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책상 옆 달력은 일곱 달 전의 날짜에 고정돼 있었다. 창밖에서는 공사 중이던 건물의 크레인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 건물은 지금 완공돼 유리벽이 번쩍이는 호텔이 됐다. 이 방은 과거를 재현한 게 아니라 어느 시점에 그대로 묶어 놓은 공간이었다.
책상 위에는 실험 일지가 펼쳐져 있었다. 내 필체였다. 하지만 글자를 쓰는 힘이 지금보다 훨씬 깊었다. 여러 날 밤을 잠 못 잔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메모처럼.
'실험 041. 기억 복원 성공. 기억이 돌아오면 환자는 지난 일을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실험 054. 기억 소유자 판별 오류. 환자가 타인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믿었다.'
'실험 062. 보관국 권한 탈취 시도. 서기관이 인간의 동의 없이 징수 일정을 생성했다.'
마지막 장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실험 063. 6시를 닫을 것. 실패할 경우 나를 외부로 보내라.'
이 사람은 내가 얼마나 놀랄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책상에 앉은 남자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는 나를 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일곱 번째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제 얼굴로 그렇게 지친 표정을 짓지 마세요. 제가 퇴근 후에 거울 보기 싫어집니다.”
“농담하는 버릇은 안 변하는구나.”
“누구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 손목을 보여 줬다. 시계에는 숫자가 없었다. 유나 것처럼 붉은 선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00:00. 귀환 불가.]
“나는 차도겸이야. 일곱 달 전 이곳에 들어온 차도겸.”
“그럼 저는 뭔데요?”
그는 오래 침묵했다.
“내가 밖으로 내보낸 마지막 기록.”
손끝이 저렸다.
“대체 기록이라는 소리입니까?”
“단순한 복사본은 아니야. 네가 느끼는 고통도 진짜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진짜야. 하지만 처음 이 사건을 시작한 몸은 여기 남아 있어.”
“왜 여기 남았죠?”
회색 코트의 나는 창밖을 가리켰다.
“서아가 만든 탈출구를 닫으려고. 보관국이 그 문을 독점하면 하루에 한 시간씩 사람의 과거를 가져갈 수 있어. 그렇게 쌓인 기억은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연료가 되지.”
“현실을 만든다고요?”
“누군가 실종된 사실 자체를 바꿀 수 있어. 부모의 기억에서 자식을 지우고,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고, 살아 있었던 흔적까지 바꾼다. 그게 서기관의 목표야.”
서기관.
처음 듣는 이름인데 머릿속 깊은 곳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그럼 왜 저를 밖으로 보냈죠?”
“내가 나갈 수 없어서. 안쪽의 시간은 나를 더 이상 현실로 인정하지 않아. 밖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거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잊어버린 약속을 다시 찾고, 마지막 문을 여는 일.”
“저한테 처음부터 설명했으면 됐잖아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모든 걸 알면 서아를 구하려고 바로 이곳으로 들어와. 여섯 번 다 그랬어. 그때마다 서기관은 네가 기억하는 사람을 인질로 삼았고, 유나는 널 밖으로 밀어냈지.”
“당신은요? 그동안 뭘 했는데요?”
“여기서 문을 잡고 있었어.”
그가 붕대 감긴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붕대 사이로 검은 실이 나와 책상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그의 손목을 현실과 묶어 놓은 듯했다.
유나가 문턱에 섰다.
“도겸. 시간이 없어.”
나는 손목을 보았다. 숫자는 08:43이었다.
“서아는 어디 있습니까?”
나는 실험 일지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제가 정말 당신이 만든 기록이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었죠? 어머니도 저를 알아보고 회사에서도 저를 기억합니다.”
“외부에 있는 네가 매일 연결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 대가로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서 너를 구성하는 일부가 징수되고 있어.”
나는 얼어붙었다.
“그럼 제가 기억을 잃는 동안 다른 사람도 저를 잊고 있습니까?”
“지금은 일부만. 네가 첫날 어머니의 목소리를 잃은 건 그분의 기억에서 네 어릴 적 인사말 하나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야. 너는 그걸 모를 거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잃은 기억이 단순한 개인적인 손해가 아니라 관계의 양쪽 끝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니.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이었다. 나는 내 수첩의 가족 기록을 떠올렸다. 잊어버릴까 봐 이름을 적었는데, 상대편에서도 나를 잊을 수 있다면 종이 한 장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서아가 사람들을 구하려 했군요.”
“그래. 그 애는 기억이 개인의 물건이 아니라 관계라고 했어. 어느 쪽이든 잘라 내면 다른 쪽에도 흔적이 남는다고.”
회색 코트의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서기관이 있는 곳.”
“거기로 가는 방법은?”
그는 내게 얇은 종이를 건넸다.
‘서명 권한 이전 신청서.’
신청자: 차도겸.
수령자: 차도겸.
이전 대상: 0번 보관실 전체.
“네가 내 권한을 가져가야 해.”
“그러면 당신은?”
“여기 갇힌 몸은 완전히 사라지겠지. 하지만 네가 밖으로 나가면 우리가 살아온 시간 중 하나는 계속 이어질 거야.”
나는 종이를 쥐었다.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일까. 아니면 그는 이미 일곱 달 전에 사라진 사람일까. 생각이 복잡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 신청서를 쓰면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까?”
“문을 열 수는 있어. 구하는 건 네가 해야 해.”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분명 정지된 시간이었는데,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회색 코트의 내가 창 쪽을 보았다.
“왔군.”
유나가 우산을 펼쳤다. 검은 실이 문 가장자리를 덮었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가죽 구두가 바닥을 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서명 이전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문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섰다. 얼굴도, 표정도 평범했다. 평범해서 더 무서웠다. 마치 아무 관계 없는 회계 담당자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러 온 듯했다.
유나가 말했다.
“서기관.”
그 남자는 유나를 보지 않았다. 나를 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도겸 씨. 아니, 일곱 번째 차도겸 씨.”
그는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에는 진서아가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서아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나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나는 말없이 손을 내려다봤다. 우리가 여섯 번 같은 장면을 반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그녀가 나를 되돌려 보냈고, 매번 나는 왜 그랬느냐고 물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의 선택을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고, 지금 여기에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유나 씨.”
“응.”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끝까지 본인이 본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제가 또 잊으면 다시 말해 주세요.”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이번엔 잊지 않게 할 거야.”
나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서기관이 덧붙였다.
“대신 그녀를 만나려면 먼저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두 개의 시계가 나타났다. 하나는 08:00에서 거꾸로 줄어드는 시계, 다른 하나는 60:00을 가리키는 새 시계였다.
“여기 계신 원본 차도겸 씨를 지우시겠습니까? 아니면 바깥에서 살아가는 당신의 기록을 지우시겠습니까?”
그가 미소를 지었다.
“둘 다 남겨 두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그 순간 내 수첩이 저절로 펼쳐졌다.
일곱 번째 빈칸에 글씨가 생기고 있었다. 서아의 필체였다.
‘선택하지 마. 둘 다 거짓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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