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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11화
PAYLUA ORIGINAL · 제11화

11화. 두 개의 시계와 세 번째 선택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145자

오프라인 책장
“둘 다 거짓말이야.” 수첩에 적힌 문장을 소리 내어 읽자 서기관의 미소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정확히는 입꼬리가 2밀리미터 내려갔다. 평생 남의 불행을 서류로 처리한 사람의 감정 표현치고는 상당한 폭이었다. “해당 안내 문구는 선택 절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럼 선택 절차를 만든 사람한테 항의할게요.” “그 사람은 바로 앞에 계십니다.” 서기관이 회색 코트의 나를 가리켰다. 내 눈앞에는 내가 둘이었다. 하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회사에 출근하고, 어머니 목소리를 잊고, 종이 괴물에게 쫓기며 간신히 살아남은 나. 다른 하나는 일곱 달 전 이곳에 남아 있었다는 나. 가장 기분 나쁜 건 원본이라고 불린 남자의 자세였다.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싣는 버릇까지 나와 같았다. 내가 야근을 오래 하면 무릎이 아파 그렇게 선다는 사실은 오래된 친구밖에 모른다. “선택하지 마.” 회색 코트의 내가 말했다. “나도 봤어. 그 둘은 버튼이 아니야. 동의서야.” 서기관이 손을 펼쳤다. 두 시계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원본 말소에 동의하시거나, 외부 기록 말소에 동의하시면 됩니다. 어느 쪽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으면요?” “여덟 분 후 원본의 보관 기간이 만료됩니다. 외부 기록은 계약 위반 상태로 처리됩니다.” “결국 둘 다 지우겠다는 말이군요.” “당사의 선택지가 두 가지라는 뜻입니다.” 나는 서기관을 똑바로 보았다. “선택지가 두 개라고 인생이 두 개뿐인 건 아니죠. 저 개발자입니다. 버튼 두 개만 뜨면 일단 개발자 도구부터 엽니다.” 유나가 웃지 않았다. 그게 지금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알려 주었다. 나는 서기관의 손을 잡는 대신 사진을 집어 들었다. 진서아가 웃고 있는 사진. 기억을 빼앗길 때마다 얼굴이 비어 버리던 사진과 달리, 이번 사진 속 얼굴은 선명했다. 왼쪽 눈 아래 작은 점, 웃을 때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서아는 어디 있습니까?” “당사자의 접근 권한이 유효해지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보관물입니까, 직원입니까?” “질문을 변경하셨군요.” “답변을 회피하셨네요.” 서기관의 눈이 잠깐 회색 코트의 나를 향했다. 원본이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서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네가 여기에 들어온 날, 네가 서명한 것.” 그가 종이를 건넸다. 상단에는 ‘제6시 보관국 자발적 기억 위탁 계약’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은 차도겸, 날짜는 6월 13일. 손으로 눌러 쓴 서명은 분명 내 필체였다. 나는 서류 첫 장의 모서리를 만졌다. 종이 아래쪽에 희미한 커피 자국이 있었다. 회의실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마시던 자판기 커피처럼 진한 자국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종이는 저절로 변하고, 계약서도 수정된다. 내가 알고 있던 물리적 흔적조차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원본이라고 불리는 당신.” 나는 회색 코트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 줄 수 있어요?” 그는 대답 대신 왼쪽 팔꿈치를 걷었다. 팔꿈치 안쪽에 굽은 흉터가 있었다. 여덟 살 때 놀이터 철봉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 내 팔에도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그가 말했다. “복제한 사람에게는 흉터도 복제할 수 있겠지. 네가 내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뭔데요?” “지금부터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의 말은 수수께끼 같았다. 나는 거창한 선택을 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은 일단 살아서 퇴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내미는 팔에는 나와 똑같은 상처가 있었고, 그 상처를 입었던 날의 두려움은 이상하게도 또렷이 기억났다. “원본이라고 해서 저한테 명령할 자격은 없습니다.” “알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일 잘 알지.” 그제야 나는 그를 적이 아니라 따로 살아온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건 이름표가 아니라, 눈앞에서 하는 말과 행동일지도 몰랐다. 그 아래에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가느다란 글씨가 이어졌다. ‘계약자는 보관 목적 달성을 위하여 시간 분기를 생성할 수 있다. 다만 분기 시점 이후 각 주체는 독립된 기억 주체로 취급하며, 어느 한쪽의 말소는 타방의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없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이거요. 누가 작성했죠?” 원본이 대답했다. “내가. 마지막 조항은 서아가 넣었어.” “그럼 저쪽이 내민 두 시계는 처음부터 계약 위반인데요.” 서기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종이 위 글씨 하나가 스르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종이의 하단에 작은 빈칸이 세 개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서명자, 검증자, 열람자. 서명자에는 차도겸이라는 글씨가, 검증자에는 진서아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열람자 칸은 비어 있었다. “열람자가 비어 있는데 이걸 완료된 계약이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서기관이 답했다. “처리 권한이 있는 직원은 열람을 생략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볼 수도 없는 계약서를 직원끼리 고쳤다는 얘기네요.” “절차상 하자는 없었습니다.” “법률상 하자가 없다는 얘기는 안 하시네요.” 내 말에 원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생각을 반박하기보다 완성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역시 누군가의 판단에 기대어 살아남는 사람이었다. 유나가 내 팔을 세게 잡았다. “도겸, 빨리. 저 사람은 계약서를 수정할 수 있어.” 나는 지워지는 조항에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댔다. 화면은 켜졌지만 저장 아이콘을 누르는 순간 ‘저장 공간 없음’이라는 문구가 떴다. 기가바이트가 수십 남아 있는데도. “보관국 안에서는 전자 기록이 효력을 갖지 않아.” 원본이 말했다. “네 머리도 오래 못 버텨. 그런데 종이는 달라.” 나는 수첩을 펼쳤다. 볼펜을 쥐고 계약 문장을 베꼈다. 서기관이 다가왔다. 유나가 펼친 우산에서 검은 실들이 뻗어 나와 그의 발을 감았다. 실 끝의 이름표들이 불길하게 울렸다. “불법 복제를 중지하십시오.” “회사에서 제일 많이 듣던 말인데.” 나는 적었다. ‘시간 분기 이후 독립된 기억 주체. 어느 쪽도 타방 말소 권리 없음.’ 그 순간 계약서가 완전히 하얗게 변했다. 서기관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문은 소멸되었습니다.” “제가 본 건 남았는데요.” 나는 수첩을 들어 보였다. “사본은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 요청에는 첨부할 수 있겠죠.” 원본이 갑자기 웃었다. 같은 웃음소리가 둘의 입에서 시간차로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드디어 알아챘네.” 그가 내 수첩의 맨 뒷장을 가리켰다. 예전의 내가 남긴 일곱 번째 경고 아래, 보이지 않던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당신이 서명한 계약의 수정 내역 열람을 요구한다.’ 나는 읽었다. 서기관은 처음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감사 권한은 계약자 본인에게만 있습니다.” “어느 본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원본도 계약자고, 전 분기 후 독립 주체라면서요.” “두 분이 동시에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약관에 있습니까?” 침묵. 나는 두 시계를 집지 않고, 회색 코트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요구하죠.” 원본은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믿을 이유가 없는데.” “맞아요. 그래도 남을 지우기 전에 확인해 볼 건 많잖아요.” 그가 손을 잡았다. 발밑 바닥에 새하얀 선이 그어졌다. 방 전체에 서류 넘기는 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서기관의 손에 있던 두 시계가 균열을 일으켰다. [계약 당사자 공동 이의 신청.] [제6시 보관국 감사 절차 개시.] [감사 중 당사자 강제 말소 일시 중지.] 허공에 검은 문이 열렸다. 나는 그제야 유나가 숨을 내쉬는 것을 들었다. “성공했어?” “실제로요? 대기업 고객센터에 문의 넣은 수준이에요. 접수 번호가 나와야 믿죠.” 그러자 문 위에 숫자가 떠올랐다. [감사번호 0613-0007.] “나왔네요.” 하지만 서기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을 모으고 깍듯이 인사했다. “접수를 환영합니다. 다만 감사 요청자는 감사가 종료될 때까지 증거로 취급됩니다.” 원본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은…….” “원본은 보관국에 남습니다. 외부 주체는 현실에서 수집된 증거의 진위를 입증해야 합니다. 감사가 기각되면 양측의 말소 조항이 모두 집행됩니다.” 나는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60분이 아니라 08:00이 표시되었다. 원본이 가진 여덟 분이 내 시계와 연결되고 있었다. “증거는 뭘 모아야 합니까?” 서기관은 대답 대신 얇은 봉투를 건넸다. 표지에 쓰인 제목은 ‘위탁 대상자 동의 누락 목록’이었다. 첫 장에는 김태오, 두 번째에는 남하린, 세 번째에는 오재민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 진서아. 내 손이 멈췄다. 그녀는 계약서에 조항을 추가한 공동 설계자가 아니라, 동의 없이 기억을 맡겨진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서아가 왜 여기 있죠?” 원본이 대답하려는 순간, 여덟 분 시계가 07:59로 바뀌었다. 서기관이 미소 지었다. “감사 기간의 시작을 축하드립니다. 외부 시간 기준 하루입니다. 월요일 오후 6시 정각까지입니다.” “월요일?”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원본에게는 아직 일곱 분 남짓. 나에게는 하루뿐이었다. “시간 계산이 이상하군요.” “이곳에서는 늘 그렇습니다.” 유나가 검은 봉투를 빼앗아 내 품에 넣었다. 문 쪽으로 뛰며 소리쳤다. “도겸, 나가! 기혁 형사님이 전원을 끊기로 했잖아!” 나는 원본을 돌아봤다. “다음에 꼭 데리러 올게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를 데리러 오지 마.” “왜요?” “우릴 만든 사람을 찾아. 그리고…….” 말끝이 들리지 않았다. 문 저편에서 서버 팬이 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정지된 세계인데, 현실에서 예정한 전원 차단이 문턱을 흔들었다. 원본이 마지막으로 입 모양만 움직였다. ‘서아가 아니라, 나를 의심해.’ 나는 검은 문을 통과했다. 세상의 시간이 돌아오기 직전, 손목의 숫자가 붉어졌다. [일곱 번째 기억 징수 완료.] 나는 서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잊었다. 대신 수첩에 두 줄은 남았다. ‘선택하지 마. 둘 다 거짓말이야.’ ‘그리고 감사자는 내일 오후 6시까지 증거를 가져와야 한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내가 왜 그 여자를 그토록 찾으려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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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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