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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88화
PAYLUA ORIGINAL · 제88화

88화. 죽은 사람의 관리자 계정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103자

오프라인 책장
제3의 기록은 녹음도 계약서도 아니었다. 열여덟 시 십삼 분. 사고가 종료된 뒤 누군가가 찍은 사진 세 장이었다. 모두 같은 승강기 앞을 찍었지만 각도가 달랐다. 첫 사진에는 구조된 사람을 실은 들것이 있었고, 두 번째 사진에는 문이 닫힌 승강기가 있었다. 세 번째 사진에는 아무도 없는 복도가 있었다. “순서대로 찍은 건가요?” 내가 물었다. 강문석이 사진의 테두리와 필름 번호를 대조했다.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인화 순서와 촬영 순서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 장이 같은 필름에서 나왔다는 흔적은 있습니다.” 세 번째 사진 아래에는 손으로 적은 문장이 있었다. ‘그날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누가 남았는지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서명은 한정호였다.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9번 계단의 파란 도장 옆에 남아 있던 바로 그 이름. 구태형 운영망은 한정호의 인증키를 비상 관리자 권한처럼 써 왔다. 그런데 여기 적힌 한정호는 누군가를 가두거나 시간을 연장한 사람이 아니라, 사고 현장에 누가 남았는지 확인하려던 사람이었다. “이분이 아직 살아 계신지부터 확인해야겠죠.” 기혁 형사가 말했다. “그리고 이게 진짜 한정호 씨가 쓴 건지도요.” 서아는 글씨의 모양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다 작은 표시를 가리켰다. ‘확인’이라는 단어의 받침 아래에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예전에 복원한 파란 도장의 서명에도 같은 점이 있었다. 필적만으로 작성자를 확정할 수 없었지만 비교할 표본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사진을 보고 있을 때, 별관 밖에서 한 여성이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약속한 방문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한정호의 딸 한은채라고 소개했다.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였다. 그녀는 출입 허가가 없는 곳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관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먼저 왔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누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형사는 그녀가 제공하는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확인할지 설명했다. 여성은 오래된 봉투와 인감이 찍힌 서류 사본을 보여 주었다. 사본에는 한정호가 병원과 맺은 임시 안전 감독 계약이 적혀 있었다. 계약기간은 단 사흘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영원히 근무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날 사고를 조사하고 사흘 뒤 집에 돌아오셨어요. 그때 저희 엄마가 아침밥을 차려 줬어요.” “귀가를 증명할 기록이 있습니까?” 그녀는 작은 사진첩을 펼쳤다. 다섯 살 아이가 케이크 앞에 앉아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아빠가 돌아온 다음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날짜는 1998년 6월 17일이었다. 나는 사진을 들고 오래 바라봤다. 시스템은 한정호가 1998년부터 근무를 마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딸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의 생일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한정호 씨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물었다. 한은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이상한 전화가 많이 왔습니다. 병원에 아직 근무 중이라면서 출근 확인을 해 달라는 전화요. 아버지가 화를 내셨죠. 내가 근무를 끝내지 않았으면 우리 딸을 어떻게 키웠겠느냐고.” 나는 그 말을 정확히 적었다. 여기에 나타난 기록과 가족의 기억은 서로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정호의 가족은 그를 '미귀가자'로 기억하지 않았다. 은채는 봉투 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한정호가 남긴 유서가 아니라 생전에 작성한 진술서였다. ‘나는 1998년 6월 13일 18시 13분에 사고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 한 명이 더 남았다는 보고를 확인하려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보관 시각의 수령자가 되겠다고 서명한 적이 없다. 내 이름과 비상 키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말라.’ “이걸 저희에게 주셔도 괜찮습니까?” 형사가 물었다. “사본은 드릴게요. 원본은 가족이 보관하겠습니다.” 그녀의 선택은 분명했다. 우리에게 자료를 제공한다고 해서 원본까지 내놓을 의무는 없었다. 오랜 세월 누군가 빌려 간 아버지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는 사람이었다. 서아가 물었다. “한정호 씨가 마지막까지 확인하려 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은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가 늘 0번이라고 하셨어요. 이름이 없어 사람으로 세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나는 몸이 굳는 걸 느꼈다. 0번 직원. 원래는 이름이 없던 사람이 아니라, 사고 당시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던 사람을 뜻했을 수도 있었다. 그때 은채가 가방에서 작은 시계를 꺼냈다. 금속 뒷면에는 손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여섯 시가 돌아오면 그날 남은 사람에게 이름을 물을 것.’ 유나는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장민호가 보여 준 금속판 뒷면과 비슷한 문장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진 두 기록이 같은 원칙을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한정호 씨는 그날 사람을 한 명 더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은채가 답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늘 덧붙이신 말이 있어요. 그 사람을 못 찾았다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면 안 된다고.” 우리는 은채의 증언을 마친 뒤 그녀가 원하는 연락 방식을 물었다. 사건이 진행된다는 이유로 유족에게 매번 뜻밖의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주요 확인 결과가 생길 때만 연락받겠다고 했다. 한은채가 돌아가기 전에 내게 물었다. “차도겸 씨는 아버지 기억이 많이 없으시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꼭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가족을 키웠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의 기록은 아직 여섯 시를 떠돌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상실을 겪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왔다. “꼭 모든 걸 알아야 한다기보다, 지금 누군가를 잘못된 기록으로 묶어 두고 있어서요.” “그 일이 끝나면요?” “그때는 아버지 이야기를 그냥 가족끼리 하고 싶습니다. 무슨 시스템의 비밀이 아니라요.” 은채가 작게 웃었다. “그게 좋겠네요. 저희 아버지는 생전에 계단을 세 번씩 확인하고 나서야 집에 오셨어요. 어릴 땐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누가 남았는지 확인하는 습관이었나 봐요.”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이상하죠. 세상을 떠난 사람 이름으로 계속 출근 기록이 만들어지는 걸 보니까, 가족이 함께 보낸 세월까지 누가 가짜로 만드는 것 같아요.” “그건 가짜가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사진을 봤어요. 생일 케이크 앞에서 웃는 얼굴도요.” “사진이 있다고 전부 증명되는 건 아니지만, 그날 아버지가 제 곁에 계셨던 건 확실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부친의 근무 여부를 다투는 자료일 뿐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 지닌 일상의 기록이기도 했다. 우리가 자료를 사용할 때 그 의미를 망가뜨리지 않아야 했다. 은채는 계단 출입문 앞에서 한 번 돌아봤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이 있어요. 사람이 집에 왔다고 확인하는 건 책임을 끝내겠다는 말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이라고.” “그 말, 적어도 될까요?” 그녀는 잠깐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도 같이 적어 주세요. 아버지가 아니라 제가 전한 말이라고요.” 나는 서아의 수첩에 적었다. ‘한은채의 기억. 한정호에게 들었다고 전한 말.’ 누군가의 마음을 원본 서명처럼 사용하지 않으려고, 출처를 분명히 했다. 오후 네 시, 실험 장치에서 은채가 제공한 한정호의 문서를 비교했다. 원본 근무 확인 로그와 2019년 비상 관리자 발급 이력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한정호 본인이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이름으로 승인 서명이 여러 차례 발급된 것이다. “이제는 명백하네요.” 시우가 말했다. “본인이 직접 승인할 수 없는 시점에도 그의 계정이 사용됐습니다.” “누가 사용했는지는 더 찾아야 합니다. 사망 시점과 발급 시점의 관계를 근거로 조사 요청을 할 수 있겠죠.” 남 형사가 답했다. 그 전까지 우리는 한은채가 준 문서를 읽을 때마다 조심했다. 사망 기록과 승인 시점이 충돌한다고 해서 누가 범인인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시스템에 남아 있는 이름은 이미 사망한 사람의 것이었지만, 실제로 인증서를 발급하고 사용한 주체는 별도의 조직일 수 있었다. “이건 유령이 로그인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유령처럼 보이게 만든 겁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구조를 유지해 온 사람이 있을 거고요.” 서아는 발급 요청서의 결재란을 확인했다. 담당자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사유는 늘 비슷했다. ‘기존 비상 운영의 연속성 확보.’ 원본 사고 보고서에는 비상 운영이 끝나면 권한을 회수하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연속성을 이유로 오히려 권한을 연장했다. “업무를 이어 가려면 사람이 바뀌어도 기록은 남아 있어야 하잖아.” 서아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선 기록을 남기는 대신 죽은 사람의 이름을 계속 사용했네.” 나는 생각했다. 기록의 연속성과 신원 도용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사람이 바뀌었으면 누가 언제 업무를 넘겨받았는지 남겨야 했다. 과거의 담당자를 계속 실행 중이라고 표시해서는 안 됐다. 우리는 문서 보존 요청을 추가했고, 확인 가능한 장비에서 비상 관리자 권한이 새로 행사될 때마다 별도의 경고를 남기는 절차를 점검했다. 한은채에게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혐의를 전달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잘못 쓰이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지, 또 다른 추측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앙 장부는 우리의 비교 작업을 감지한 듯 새 안내를 보냈다. [0번 직원의 현재 신원: 불명] [신원 미확인 상태에서는 차도겸을 대리 담당자로 유지]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왜 사람 하나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대신 세죠?” 은채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그 사람을 못 찾았다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면 안 된다고. 나는 화면에 새로운 메모를 남겼다. ‘0번은 빈칸이다. 빈칸을 채우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빼앗지 말 것.’ 그러자 화면이 잠깐 어두워졌다. 내가 입력한 것은 단순한 메모였는데, 9번 계단 장부에서 상태가 바뀌었다. [0번 직원: 미확인 상태로 보존] [차도겸 대리 지정: 이의 제기 접수] 아직 확정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내 거절이 삭제되지 않고 사건 기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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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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