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한 것과 못 한 것은 다르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적었다. 첫 번째는 내 수첩에, 두 번째는 팀의 사건 보드에, 세 번째는 아침에 읽을 메모에. 오래전의 나는 수령을 거부했다고 했고, 현재 운영망은 아직 수령을 완료하지 않았다고 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사람의 의사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다.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일까요?” 유나가 물었다.
“둘 다 사실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수도 있죠. 기록을 그렇게 가공해 놓으면 보는 사람이 헷갈리니까요.”
시우는 두 장치의 데이터를 복제한 시험 환경을 열었다. 한쪽은 오후 여섯 시의 정지 장치, 다른 한쪽은 오전 여섯 시의 귀환 장치였다. 우리가 실제 접속 권한을 가진 시험 환경에서만 조작했고, 중앙 운영망에는 승인이나 변경 요청을 보내지 않았다.
“정지 장치에는 ‘상태 보관’이 있고 귀환 장치에는 ‘보관 해제’가 있어요. 당연히 둘이 연결돼야 하는데, 지금은 중간에 운영사가 만든 ‘수령 승인’ 단계가 들어가 있네요.”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됐죠?”
“보관이 끝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을 겁니다. 물론 장치가 정상 작동했을 때의 이야기예요.”
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두 시스템 사이에는 원래 작은 통로 하나가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 그 통로를 끊고, 자신들의 중앙 장부를 거쳐야만 돌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서아가 계약서 사본을 폈다. “처음 서류에는 '수령자 확인'이라는 항목이 없었어. 대신 '보관 해제 시 당사자 의사 확인'이라는 문장이 있었지.”
“사람이 집에 돌아갈지 말지 묻는 절차가 나중에는 다른 사람이 시간을 떠맡을지 묻는 절차로 바뀐 거네요.”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늘고 있어. 다만 계약서의 법적 효력은 따로 판단해야 하고.”
나는 웃었다. 요즘 우리의 대화에는 '다만'이 많아졌다. 처음 사건을 겪을 때는 무엇이든 단정하고 싶었다. 누군가 범인이고 누군가 피해자이며, 버튼 하나를 누르면 끝날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그 단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장부의 빈칸으로 밀어 넣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날 새벽의 관측을 결정하기까지 작은 논쟁이 있었다. 시우는 안전 장비를 더 확보하지 못하면 다음 날로 미루자고 했다. 나는 하루를 더 기다리는 동안 중앙 장부가 가족에게 다시 연락할까 봐 조급했다. 서아는 두 사람의 말을 듣더니 손을 들어 끊었다.
“시간이 없어서 안전을 포기하면, 또 누군가에게 비용을 떠넘기게 돼.”
“알아. 그런데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 내가 말했다.
“그런 가능성이 있으니 먼저 경고하고 기록해야지. 우리가 다치는 걸 예산처럼 계산할 순 없어.”
유나는 내 옆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결국 일정을 바꿨다. 관측에는 현장 안전 관리자의 입회가 필요했고, 복도 내부로 들어가지 않는 조건이어야 했다. 장비 한 대가 늦게 도착한다는 연락이 오자 대체 장비의 정확도를 다시 확인했다.
현장에 오기 전, 동생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오빠, 오늘 수술 경과 진료 다녀왔어. 별문제 없대. 이상한 봉투는 그대로 놔뒀어. 그리고 오빠 밥 꼭 먹어.’
나는 한참 그 문자를 바라봤다. 동생은 내게 어떤 시간도 맡기지 않았다. 자기 하루를 살았고, 거기에 내 걱정이 조금 섞여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걸 지켜 줘야 했다.
“오늘 관측이 실패하면요?” 내가 물었다.
시우가 대답했다. “실패라고 부르지 않고 미확인이라고 적을 겁니다. 당장 알지 못하는 걸 인정하고 장비를 거둬 가면 돼요.”
나는 그 말에 조금 안도했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 사건을 끝내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와 동료들이 증명하려는 것은 그 반대였다.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도 사람은 돌아올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각자의 연락 수단을 시험했다. 영상이 끊기면 서로를 부르는 시간을 정했고, 장비 이상이 나타날 때 가장 먼저 철수할 사람도 정했다. 먼저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배신자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남아 있는 누군가에게도 안전한 길을 만들기 위한 순서였다.
오전 다섯 시 사십 분. 우리는 별관 관리인의 동의를 얻어 관측 장비를 설치했다. 9번 계단의 안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에 접근 가능한 복도에서만 관찰했다. 장민호가 증인으로 와 주었다. 그는 낡은 철제 숫자판 ‘11’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걸 말하면 되는 거지? 위험한 데 들어가라는 건 아니지?”
“절대 아닙니다.” 내가 답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 주세요.”
“그건 자신 있지. 나이 먹으니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거든.”
우리는 서로 웃었다.
06:00:00.
별관 복도 끝의 벽면이 천천히 창백해졌다. 나는 시간을 멈춘 세계에서 늘 느끼던 익숙한 고요를 예상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먼 곳에서 수저 부딪히는 소리,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누군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그 소리는 현재 병원의 소리가 아니었다. 1998년의 응급전원실에서 들려온 듯했다.
[귀환 장치: 최초 복구 시험]
[잔여 보관 시각: 00:11:00]
“열한 분 전부가 아직 남아 있었어요?” 시우가 물었다.
“우리가 어제 1분을 관측했으니까 잔여 시간이 10분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말했다.
그는 빠르게 확인했다. “어제의 1분은 원본이 아니라 관측용 복제 구간이었어요. 원래의 열한 분을 사용한 게 아닙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언가를 알아보겠다고 원본의 시간을 소모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소유자도 확인되지 않은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쓰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발소리는 처음에는 셋이 걸어오는 것처럼 들렸다. 구두 소리, 운동화 소리, 바닥을 끄는 소리. 그러나 파형을 비교하던 문석은 세 가지 소리가 같은 간격으로 반복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순간에 걷던 소리가 겹친 걸 수도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럼 계단에 사람이 셋 있다는 뜻은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음원 수와 사람 수를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나는 9번 계단의 장부를 떠올렸다. 시스템은 몇 개의 소리와 그림자만으로 인원을 만들어 냈을지도 몰랐다. 혹은 원래의 누군가를 지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흔적을 여러 번 복제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은 어느 쪽도 확인할 수 없었다.
유나는 녹음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잔상과 듣는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복도 벽을 그대로 봤고, 어떤 사람은 과거의 의료 장비를 보았다고 했다. 나는 자신이 본 장면을 말했지만 모두가 똑같은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른 걸 보고 있으면 어떡하지?” 유나가 물었다.
“그래서 서로 확인하는 거죠. 한 사람의 기억을 진실이라고 고정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우리는 기억을 복구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같은 순간을 각자 다르게 본다면 복구된 기억도 비교해야 했다. 각자가 자신이 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손목시계가 보내는 진동보다 옆에서 들리는 유나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큼은 오늘의 기록으로 충분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오래된 녹음처럼 작았지만, 점점 또렷해졌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조그만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십니까?”
내 목이 잠겼다. 그 목소리가 사진 속 차정수의 것이라고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컸다.
“저는 차도겸입니다.”
“아직 아이입니까?”
“아니요. 다 컸어요.”
남자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뒷모습 너머로 보이는 손목에는 금속 시계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부탁했던 말씀은 전해졌습니까?”
“무슨 말씀이요?”
“시간을 인계받지 마십시오. 다 자란 뒤에도.”
나는 한순간 숨을 멈췄다.
그 말은 아버지의 부탁처럼 들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내 결정을 특정 방향으로 몰기 위해 설계한 안내문 같기도 했다.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당신이 누군지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왜 제게 부탁하시는지도요.”
남자가 대답하지 않는 사이, 시우가 관측 화면을 확인했다. 얼굴이 없는 그림자는 다른 카메라에서 보이지 않았다. 음성은 녹음 장치 두 대에 남았다. 아버지 본인이 나타난 것인지, 과거의 녹음이 재생된 것인지 여전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걸 아버지라고 확정하지 마.” 유나가 조용히 말했다.
“알아요.”
남자의 그림자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복도 벽에 바랜 글씨가 떠올랐다.
[1998년 구조 일지 / 차정수]
[열한 분 동안 이동한 사람: 3명]
[시간 정지 구간에서 부상한 사람: 1명]
[추가 구조를 위해 보관 연장 요청: 없음]
마지막 줄이 눈에 박혔다. 누군가 구조를 계속하기 위해 시간을 연장했다는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적어도 이 기록에 따르면 그날 차정수는 연장을 요청하지 않았다.
“누가 영구 보관을 신청했죠?” 내가 물었다.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얼굴을 보려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접힌 종이였다.
‘종료 취소 신청: 1998.06.13 18:13.’
신청자 칸에는 이름 대신 작은 붉은 네모가 찍혀 있었다. 지금까지 원본을 조작해 온 빨간 도장과 같은 모양이었다.
순간 정지 장치의 경고가 울렸다.
[귀환 요청과 종료 취소 요청이 충돌하였습니다.]
[둘 중 하나의 기록이 확정되면 나머지가 자동 폐기됩니다.]
“또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네요.” 내가 말했다.
서아가 종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원본을 폐기하게 놔두면 안 돼.”
나는 복도 끝에서 사라지는 그림자 대신 우리 팀을 보았다. 아무도 선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리고 오전 여섯 시 십일 분, 잔여 보관 시간이 잠깐 검게 변하며 네 글자가 나타났다.
[제3의 기록 존재]
첫 기록은 돌아가려 했고, 두 번째 기록은 돌아가는 것을 취소하려 했다. 그렇다면 그 둘을 지켜본 세 번째 기록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제87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