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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82화
PAYLUA ORIGINAL · 제82화

82화. 1998년의 수령 예정자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177자

오프라인 책장
‘수령 예정자.’ 화면에서 그 네 글자를 읽고 나니 오래전 아버지가 들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시간을 돌려 달라는 어린아이의 부탁. 아버지는 그것을 돌려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려주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숫자부터 정리하죠.” 강문석이 모니터를 돌렸다. “1998년 원장부의 첫 칸은 완전히 비어 있습니다. 0번은 그다음에 생겼어요. 빈칸을 채운 것이 아니라 빈칸에 붙은 사람 이름을 별도 항목으로 복사한 흔적입니다.” “어린애를 인계 대상으로 적었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결론 내리기엔 일러요. 수령 예정자라는 표현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보관된 물건을 찾아갈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니까요.” 남기혁 형사는 종이 문서를 가리켰다. “원본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사진은 단서일 뿐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통화해 원본을 보존할 방법을 설명했다. 함부로 지우거나 닦지 말고, 발견한 위치와 시간을 따로 적어 두도록 했다. 어머니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 물건이니까 제가 맡고 있을게요. 필요하면 절차대로 드리겠습니다. 다만 꼭 하나 말해 주세요. 그 종이에 제 아들이 죄를 지은 것처럼 쓰여 있나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에요, 엄마. 오히려 누가 제 이름을 허락 없이 사용했는지 찾는 중이에요.” 통화가 끝나자 서아가 물었다. “네가 어릴 때 쓰던 이름표가 남아 있었지?” “아마요. 오래된 앨범에 있을지도.” “그게 왜 중요해?” 시우가 물었다. “그날 기록의 차도겸과 지금 장부가 부르는 차도겸이 같은 사람이라는 주장을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는 아동의 근무 기록으로 이어지는 모든 연결을 잠시 분리해서 표로 만들었다. 환자 보호자 출입 목록, 기술실 임시 출입 카드, 중앙 운영망의 대리 승인 계정. 세 가지는 출처도 목적도 달랐다. 그러나 현재의 시스템은 이 모든 것을 ‘사원’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어 놓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를 옮길 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일부 칼럼이 비슷하다고 같은 의미인 줄 알면요. 그런데 어린아이한테 근무자 권한까지 부여한 건 일반 오류라고 하기 어렵죠.” 시우가 오래된 변환 프로그램의 설명서를 찾아냈다. 2007년 작성된 파일이었다. 주석에는 ‘0번 예외 계정을 최초 사용자의 대체 아이디로 매핑’이라고 적혀 있었다. 최초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변환 당시의 원본 표가 없으면 이 주석만으로 확정 못 합니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잘못된 연동이 언제 생겼는지 추적할 수는 있어요.” 그때 부산의 권수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최은규 씨가 맡긴 수기 근무표의 뒷장에 1998년 영병원과 관련된 연락처가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최 씨의 아버지가 오래전 병원에 시설 정비 일을 나간 적이 있었고, 아들이 빈 종이를 구해 쓰다가 뒷장에 남아 있던 메모를 발견했다는 설명이었다. 사진에는 두 줄이 선명했다. ‘9번 계단에서 0번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 ‘비상시에만 0613을 사용할 것.’ 0613. 나는 손을 뻗어 수첩을 펼쳤다. 아주 처음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그 숫자를 발견했다. 진서아가 남긴 날짜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 뒤 여러 번 다른 기록과 연결됐다. 날짜가 자꾸 나를 따라왔다. “이게 비밀번호일 수도 있겠네요.” 시우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숫자의 용도를 확인하죠. 병원 사고 날짜가 6월 13일이니까 어디에나 적혀 있을 수 있어요.” 유나는 내 수첩과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누군가 이 숫자를 오랫동안 지우지 못하게 남기고 있어. 그건 이상하잖아.” 나는 인정했다. 같은 숫자가 우연히 반복된 것과, 그것을 숨기지 않고 다른 사람이 찾아볼 수 있게 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 전에 남 형사는 단서를 제공한 최은규 씨에게 연락했다. 그는 아버지의 기록이 영병원 사고 자료와 관련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새삼스레 겁을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묻고 싶은 게 있다며 전화를 바꿔 달라고 했다. “제가 쓴 수기 근무표를 조사 자료로 써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 일터랑 가족 관계를 전부 분석할 필요도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내가 답했다. “필요한 부분만 확인하고 다른 목적에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기록은 저희가 임의로 가져오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메모에 ‘남은 사람을 세기 전에 돌아간 사람에게 물어라’라는 말이 있었어요. 무슨 뜻인지 몰라서 버리려다가 그냥 뒀죠.” 나는 그 말을 적었다. 몇 줄 안 되는 노동자의 수첩이 거대한 중앙 장부보다 더 많은 사실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었다. 누구와 교대했고 어디서 밥을 먹었는지, 오늘은 일찍 들어갔는지. 기록의 양과 진실의 크기는 꼭 비례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친 뒤 서아가 오래된 출입카드 사진을 펼쳤다. 보호자 카드에는 사람의 서명이 있는 반면, 임시 근무자 카드에는 관리자 도장만 있었다. 지금 장부는 두 카드에서 이름과 날짜만 뽑아 하나의 직원 레코드로 만든 듯했다. “보안 시스템을 설계할 때도 이런 문제가 있겠네.” 그녀가 말했다. “출입 허가를 받았다는 것과 일하기로 계약했다는 건 전혀 다른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떤 데이터는 같은 형태라도 의미가 다르지. 출입한 사람을 전부 직원이라고 분류하면 방문객까지 월급 명세서에 올라올 거야.” 유나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월급을 주면 다들 좋아하지 않을까?” “저한테 지난 스물여덟 년 야근 수당을 주겠다면 고민 좀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웃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현재의 시스템이 어린아이를 직원으로 만들었다면, 같은 방식으로 환자와 보호자를 대상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오류 수정이 아니라 무슨 용도의 기록을 어디까지 사용해도 되는지 다시 묻는 일이었다. 시우가 시험 환경을 띄우며 설명했다. “본 시스템에는 쓰기 명령을 보내지 않습니다. 오늘 확인하는 건 과거 데이터가 어떻게 변했는지예요. 사고 장면을 재생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걸 곧장 실제 역사라고 믿으면 안 됩니다.” 나는 화면 오른쪽에 ‘복제본’이라는 붉은 표시를 붙였다. 여러 번 겪고도 쉽게 놓치는 구분이었다. 사본은 원본처럼 보일 수 있었고, 누군가 거짓말을 섞으면 그럴듯한 과거 전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우리는 시범 장치에서만 오래된 장부의 복제본을 열었다. 원본에 접속하거나 암호를 무작정 입력하지 않았다. 복제본에는 날짜 입력 기능이 남아 있었다. 강문석이 여러 날짜를 비교하자 특정 시점의 복원 목록이 나타났다. [1998.06.13 비상 기록] [18:00 정지 요청] [18:11 부분 복구] [18:13 인수인계 미완료] “11분.” 유나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한 시간은 아니었어.” 나도 놀랐다. 매일 한 시간씩 멈추는 내 능력은 원래의 사고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 장부에는 정확히 열한 분이 적혀 있었다. 열한 분 동안 누가, 무엇을 멈추려 했던 것일까. 장부의 마지막 줄에는 빈칸 두 개가 있었다. [인계자: 차정수] [수령 예정자: 보호자 동행 아동] 내가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은 이 정도로 드러났다. 이름은 없었다. 주소도 없었다. 아이가 실제로 그 장부를 받았다는 표시 역시 없었다. 시우가 빈칸 오른쪽에 나타난 숫자를 확대했다. 0번은 18시 13분에 붙었지만 ‘임시 직원 차도겸’이라는 명칭은 2007년 이관 자료에서 처음 확인됐다. 그 전에는 단지 ‘수령 예정자’였다. “누군가 9년 뒤에 아동 기록을 직원 기록으로 바꿨군요.” “혹시 그 과정에서 오래된 사고가 사업이 된 걸까요?” 내가 물었다. 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기록을 나중에 수익을 내는 장부로 고쳐 썼다면, 지금의 기억 추심도 거기서 시작됐을 수 있어.” 나는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그건 앞으로 입증해야 하는 가설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내가 1998년에 출근했다는 건 자료가 뒷받침하지 않네요.” 서아가 웃었다. “그건 애초에 상식으로도 알 수 있었어.” “상식이 서버 로그를 이겼습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네요.” 잠깐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복제 장부 화면이 붉게 변했다. [현재 수령 예정자의 위치 확인] [차도겸 — 2026.10.26 09:44] [1998년 미인계 시각을 수령하겠습니까?] 나는 화면을 눌러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전제를 의심했다. 프로그램의 버튼은 사용자가 수행할 수 있는 동작을 보여 주는 동시에, 다른 선택지를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오래전 나는 어떤 앱에서 ‘동의’와 ‘나중에 동의’만 제공하는 화면을 본 적이 있다. 지금 눈앞의 장부가 딱 그랬다. “닫기 버튼은 없나요?” 시우가 구석을 확인했다. “없어요. 복제본에서도 응답하지 않으면 같은 요청을 반복해요.” “그러면 응답하지 않음을 거절로 처리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네요.” 서아는 문서 안에 있었던 ‘인계가 불가능할 경우 원인 보존’ 조항을 다시 보여 줬다. 원본에는 분명 중단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현재 화면에는 ‘인계가 불가능할 경우 다른 사람에게 배정’만 남아 있었다. “선택지를 지운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네.” “네. 그냥 실수로 빠뜨렸다고 하기에도, 그 결과가 특정 운영자에게 너무 유리해요.” 우리는 프로그램이 보여 주는 행동과 원문이 허용한 행동을 따로 기록했다. 단지 오래된 계약서를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거절할 권리'를 잃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때 복제 화면의 요청 건수가 하나 증가했다. 누르지 않은 버튼 앞에 새로운 타이머가 생성됐다. 이 타이머가 만료될 때 실제 장치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스템이 ‘대기’로 기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번에는 대기가 승인으로 바뀌지 않게 해야 해요.” 나는 말했다. “우선 이 요청을 보낸 경로부터 확인합시다.” 버튼 두 개가 떠 있었다. ‘수령’, ‘재배정’. 내가 어느 쪽도 누르지 않자 세 번째 줄이 나타났다. [기한 경과 시 최연소 보호자에게 자동 배당] “최연소 보호자라니?” 서아가 얼굴을 굳혔다. “네 동생이야. 예전 진료기록에 보호자 번호가 남아 있거든.” 내 손끝이 싸늘해졌다. 우리가 수십 년 전 문서의 의미를 따지는 동안, 이 시스템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 가족에게 시간을 떠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동생에게 알려야 해요. 시스템 화면보다 먼저 사람이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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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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