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내일 연차인데요.”
강문석이 화면을 보다가 내 얼굴을 봤다.
“회사 연차와 장부의 출근 승인은 별개입니다.”
“그게 제일 무서운 대답이에요. 이미 연차를 승인받았는데 다른 회사에서 출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회사가 아니라 1998년 영병원입니다.”
“그럼 더 무섭죠. 제가 그 병원에서 뭘 할 줄 안다고요.”
웃고 싶어서 한 말이었지만 아무도 크게 웃지 않았다. 내일 오전 여섯 시, 시스템은 내가 28년 전 끝나지 않은 근무를 대신 이어받도록 예약해 두었다. 동의서도 면접도, 하다못해 교통비 지급 약속도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출근하지 않아도 이미 출근한 사람으로 처리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서아가 화면을 캡처했다.
“어제 윤혜정 씨에게 했던 짓을 또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출근 기록을 미리 승인해 놓고 거절하면 이미 승인됐다고 주장하지.”
“그럼 오늘 중에 취소하면 되겠네요.”
“네가 직접 취소해도 그게 출근 승인 키를 재발행할 계기가 될 수 있어. 아직 인터페이스의 실제 동작을 검증하지 못했잖아.”
나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그때 서기관이 보관국의 민원 창을 열었다. 예전에는 그가 한 장 한 장 규정을 읽으며 우리를 막았다. 오늘은 담당자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중지 요청 양식을 먼저 가져왔다. 작은 변화였지만 나는 고마웠다.
“원본 장치에는 대리 근무의 거부 절차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현재 출근망은 ‘이미 결재된 업무’라는 이유로 중지 신청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재를 누가 했죠?”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건 귀하의 계정으로 결재 요청이 수신됐다는 사실뿐입니다.”
이쯤 되면 내 이름은 전국에서 가장 바쁜 이름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오래 일한 기억이 없다. 물론 기억이 사라지는 능력을 갖게 된 뒤로는 그 말도 완벽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
남 형사가 말했다.
“접속 기록을 남깁시다. 본인이 아니라는 진술도요. 지금 당장 버튼을 눌러 승인 여부를 시험하지 마세요.”
우리는 대체 출근 요청이 어떤 계정과 사업장으로 향하는지 읽기 전용 방식으로 확인했다. 실제 회사 서비스에 무단으로 접속하거나 다른 사람의 기록을 변경하지 않았다. 강문석은 장비 제조사와 계약상 담당자에게 작업 이력의 보존을 요청했다. 모든 요청은 담당자의 권한 범위 안에서 이뤄졌다.
그날 오후 우리는 수첩에 한 가지 기준을 적었다. ‘오늘 취소할 출근은 내 이름으로 만든 예약이고, 실제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근무 기록은 아니다.’ 당연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출근망이 여러 사람의 이름을 묶는 순간 당연한 문장부터 사라진다.
한시우는 장비 공급사에 자신이 원본 계약의 유효성을 다투고 있다는 사실을 통지했다. 중앙망의 연장 신청을 보류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각 사업장의 피해가 있는지 안전 담당자들과 연락했다. 그는 종종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때문에 일어난 일처럼 느낀다고 말했다.
“당신 책임이 아니라고 말해 드릴까요?” 내가 물었다.
“확실히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겠죠. 우리 회사 계약이 걸려 있으니까.”
“그렇다고 안 한 일을 다 책임지실 필요도 없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려고요. 문서를 확인하고, 관련자에게 알리고, 멈출 수 있는 곳은 합법적인 절차로 중지하는 거요.”
그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그런데 말입니다. 회사 사람들이 이번 사건 때문에 저를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기도 합니다. 제가 1998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지금의 저한테 무엇을 기대할까요?”
“모르겠어요.”
“저도요. 어린 제가 문 안에 남아 있다는 걸 안 뒤로는 사람들이 저를 둘 중 하나로 고르려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그에게 0번 보관실의 아이를 오늘의 회사 경영 책임에 묶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시간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한시우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내가 정말 어른인가 싶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건 회사원 모두의 고민 아닐까요. 특히 세금 낼 때요.”
시우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났을 때 우리는 낡은 병원 계약서 하나를 더 발견했다. 어떤 회사가 복제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원본의 거부권을 이전할 수 없다는 부속 조항이었다. 실제 효력이 있는지 법률 검토가 필요했지만, 우리가 요구할 근거 하나가 더 늘었다.
서아는 조항 아래에 ‘원본을 먼저 확인’이라고 적었다. 나는 그 문장을 동그라미 쳤다. 무엇을 하든 누군가의 기억을 먼저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를 끝까지 찾고 싶었다.
다음 날 새벽까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한 시간만 눈을 붙이기로 했다. 이럴 때는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보다 실제로 쉬는 편이 나았다. 인간의 기억이 사라지는 사건을 다루는 사람이 수면 부족으로 기억을 잃으면 조사부터 꼬이기 때문이다.
눈을 뜨니 어머니가 옆에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잠든 동안 내 휴대전화에 쓸데없는 알림이 오지 않게 조용히 뒤집어 놓았다.
“밥 먹고 좀 더 자.”
“엄마는?”
“나도 잤어. 오늘은 아버지 꿈을 조금 꿨어.”
나는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가 원하면 이야기해도 된다고 했다.
“그 사람이 젖은 우산을 털더라. 집 안에 물 들어온다고 투덜거렸어. 근데 내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냈어.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그날이 1998년이었어요?”
“날짜는 모르겠어. 그런 꿈을 꾼 게 오늘이야.”
그 구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꿈에서 본 장면과 실제 확인한 사실을 명확하게 나누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 사람은 쉽게 휘둘릴 거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태도였다.
밤 열 시. 서아는 과거 기록의 세 번째 아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내 이름을 빌렸던 여자아이가 있다는 말, 아직 마음에 걸려.”
“어떤 부분?”
“그 애가 왜 내 이름을 선택했는지. 내가 그때 이름을 빌려준 건지, 누가 멋대로 쓴 건지. 둘이 완전히 다른 일이잖아.”
“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
“내가 기억하는 걸 정리할 거야. 모른다고 적는 부분도 남겨 둘 거고. 그리고 당사자가 말할 수 있는 통로가 있으면 한번 물어보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가 자기 일에 결정권을 갖는 건 당연했다. 유나는 그 말을 듣고 서기관에게 비기명 주체의 질문 한도를 확인했다. 하루 한 문장 원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서아는 오늘 그 기회를 자기 질문에 쓰지 않기로 했다. 미확인 주체가 어제 문을 열지 말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먼저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자정 무렵 어머니가 전화를 걸었다. 사소한 이야기를 하려던 전화였다. 동생에게 줄 반찬을 조금 만들어 두었다며 냉장고에 넣어 놓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평범한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네가 내일 바쁘다고 해서 미리 해 뒀어.”
“저 내일 여섯 시에 출근 예정입니다. 영병원으로요.”
“거긴 네 회사 아니잖아.”
“그렇죠. 엄마가 제일 정확하게 보시네요.”
어머니는 잠깐 웃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겸아. 내가 네 아버지에 대해 다 기억하지 못해도, 그 사람이 우리를 두고 아무 이유 없이 도망간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데 네가 그 이유를 찾겠다고 무리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
“알아요.”
“잊은 사람을 찾는 일이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을 잃는 일이 되면 안 되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익숙하게 들렸다. 오래전에도 누군가 같은 말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오늘의 어머니를 또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수첩 앞장에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적었다. 어머니, 서아, 유나, 한시우, 강문석, 남기혁. 그리고 이름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 모두 누군가의 도구가 되지 않고 자기 시간을 살아야 했다.
그날 자정 가까이 내 휴대전화에는 이상한 알림이 하나 왔다.
[차도겸 — 익일 대리 출근 안내]
[장소: 영병원 0호 연결실]
[근무 내용: 귀가 확인 없는 시간의 유지]
나는 알림을 캡처하고 연결된 기기에 외부 요청이 있는지 확인했다. 종이 수첩에도 적었다. 아무도 다음 근무를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그때 모니터에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관측 로그의 미리보기였다. 나는 재생 버튼을 누른 적이 없었다. 강문석에게 받은 복제본에 자동 재생 기능이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화면 속 차정수는 낡은 병원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는 도망치는 사람처럼 급하게 걸어오더니 카메라 앞에서 숨을 골랐다.
“도겸아.”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네가 이 말을 들을 때 내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마. 누가 네 이름으로 일했다는 이유로, 네가 그 사람의 책임까지 이어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화면은 거기서 끊겼다. 복제본에 그 음성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누군가 최근에 삽입했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금 살아서 말하는 목소리라고 믿을 수도 없었다.
나는 재생 내용을 그대로 적었다. 듣고 싶은 부분만 증거로 삼지 않으려고.
그리고 영상의 가장 마지막 프레임에서 새 문장을 발견했다.
[차정수 — 최종 근무 종료 요청 접수]
[처리 결과: 제3자에 의해 반려]
수첩에 그 문장을 기록하면서 잠깐 손이 떨렸다. 너무 오래 기다린 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 내가 들은 건 화면에서 재생된 한 장면이었다. 내가 직접 본 과거는 아니었다. 그 차이를 적어 놓지 않으면 훗날 누군가 나의 확신을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원본 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석을 붙였다. 아버지를 믿고 싶다는 마음과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서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 둘 다 놓치지 않으면 된다.
아버지는 한 번도 퇴근을 요청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왜 거절했는지 확인하려면 원본 문서를 찾아야 했다. 지금은 이름 없는 반려 칸에 미움부터 적고 싶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선택까지 안다고 믿었다가 실수한 적이 있었다. 내일은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의 기록을 찾는 것보다 더 급한 일도 있었다. 내일의 출근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늘의 내가 직접 남기는 일이었다.
누군가 그 요청을 받았고,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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