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가 1998년 6월 13일 밤에 우리 집에 있었다.
그 사실은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내가 그것을 듣고도 ‘말도 안 돼’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세상이 여섯 시마다 멈추고, 어린 시절의 한시우가 어른 한시우와 같은 방에 서 있는 걸 봤다. 그렇다면 오래된 밤에 진서아가 있었다는 말은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했다.
문제는 세상이 기묘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기묘한 사실을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였다.
나는 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 만날 수 있어?”
“네가 그 말 하면 사건이 터졌다는 뜻이지.”
“항상 그런 건 아니야.”
“지난번에는 두 번째 여섯 시, 그전에는 기억 청구서였고, 첫 만남 때는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통계적으로 맞네.”
서아는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웠고, 점원은 마감 청소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장 문을 닫기 전에 산 따뜻한 차를 들고 밖 벤치에 앉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내가 그날 집에 있었대?”
“아직은 오명숙 씨의 기억이야. 사진과 장부 원본을 대조해야 해.”
“그런데 이름은 왜 내 이름이래?”
“종이배에 적혀 있었다고 하셨어.”
서아가 천천히 웃었다.
“나 종이배 접는 거 못하는데.”
“나도 못해. 우리 둘 다 같은 학교에서 종이접기 수업을 땡땡이쳤나 봐.”
농담이 너무 가벼운가 싶어 입을 닫았다. 그러나 서아가 먼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계속해. 네가 갑자기 심각해지는 것보다 농담하는 편이 낫다.”
우리는 먼저 왜 서로를 오래된 친구라고 부르는지부터 이야기했다. 그동안 나는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서아를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처럼 대했다. 서아는 그 말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녀에게도 모르는 시간이 있고, 잊어버리고 싶은 일이 있으며, 누군가 대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날이 있었다.
“내가 네 기록 담당자야?” 서아가 물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가끔은 그렇게 행동했어. 내가 너에 대해 기억하는 걸 전부 물어보고 나면 네가 날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더라.”
나는 뜨끔했다.
“미안해.”
“사과하라는 얘기가 아냐. 우리는 지금 새로 친구가 되는 중인 거야. 그러니까 오래전 친구였다는 사실을 아무 때나 꺼내서 현재의 나까지 묶어 두지 말라고.”
서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에 얼굴을 찌푸리고 설탕을 하나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알아 가는 사람에게 물어볼 법한 사소한 취향을 나는 아직도 몰랐다.
“그럼 오늘 서아 씨가 좋아하는 음식부터 알려 주시겠습니까?”
“야식은 떡볶이. 하지만 너한테는 안 알려 줄 걸 그랬어.”
“왜?”
“다음에 네가 기억을 잃으면 내가 또 알려 줘야 하잖아.”
“그러면 제가 기록할게요. 떡볶이. 맵기 중간.”
“나는 아주 매운 거 좋아해. 벌써 틀렸어.”
우리는 한참 웃었다. 웃다가 서아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겸, 내가 그날 아이였든 아니었든, 다른 여자애가 내 이름을 썼다면 왜 그랬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하지만 답을 알게 된 뒤에도 내가 그 애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나는 그런 일을 막으려고 지금까지 싸우고 있어.”
“그럼 너도. 누가 네 일곱 번째 기록을 보여 준다고 해서 그때의 선택을 무조건 다시 해야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과거의 자신은 쉽게 명령이 된다. ‘예전의 넌 그랬어’라는 한마디를 들으면 오늘의 나는 그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서아는 그 속박을 가장 먼저 알아챘다.
우리가 풀어야 할 사건이 얼마나 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밤에 나는 그녀가 어떤 차를 싫어하고 어떤 음식에 설탕을 넣는지 새로 알았다. 지난 기록이 아닌 오늘의 정보였다.
우리는 어릴 적 사진을 펼쳤다. 서아가 보내 준 초등학교 운동회 사진에는 내가 뒤편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서아는 빨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사진이 찍힌 날짜는 2000년이었다. 1998년에 병원에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나이였다.
“그런데 나한테는 병원에 대한 기억이 없어.”
“내 기억도 그렇잖아.”
“그럼 두 사람 다 기억이 없다고 같은 일을 겪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는 내가 바라는 답을 절대 쉽게 주지 않았다.
우리는 40화에서 발견한 이상한 기록을 다시 꺼냈다. 1998년 병원 파일의 ‘기록 인계 책임자: 진서아’. 당시 서아는 어린아이였을 테니 책임자로 서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현재 이름을 과거 기록에 덧씌웠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조작 시각을 찾는 게 먼저였다.
강문석은 전화로 파일 메타데이터를 설명했다.
“원본 관측 영상의 레이어와 현재 수탁 목록의 레이어가 섞여 있습니다. 화면에 나타난 문자열이 꼭 그 시대에 적힌 글씨일 필요는 없습니다. 서아 씨 이름은 2026년 수탁 계약을 병원 화면에 겹쳐 보여 준 결과일 수 있어요.”
“그럼 영상 속 여자아이가 서아라는 증거는요?”
“아직 없죠.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있었다고 알려진 일’과 ‘실제로 검증한 일’을 나눠 적었다. 그녀가 익숙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사건이라면 사람들은 대개 흥분하거나 방어적으로 굴기 마련인데, 서아는 나보다 침착했다.
그러다 손이 멈췄다.
“도겸. 나한테 이상한 꿈이 있어.”
“어떤?”
“철제 침대 밑에서 종이배를 찾는 꿈. 누군가 내 신발을 가져가서 맨발로 서 있어. 문 너머에서 한 남자가 계속 말하거든. 이름을 말해야 나갈 수 있다고.”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나는 끝까지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 이름을 말하면 다른 아이가 못 나간다고 했으니까.”
내 손목시계가 멈췄다. 평소의 오후 여섯 시가 아니었다. 자정까지 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시계만 멈춘 것이고 주변은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그 차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서아, 네가 기억해 내지 못한 걸 굳이 지금 끌어오려고 하지 마.”
“알아. 내가 먼저 말하고 싶어서 말한 거야.”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기 전에 우리끼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부터 찾자.”
그녀는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도겸, 너 왜 그렇게 나한테 조심해?”
“전에 네 동의도 없이 네 기억을 담보로 만들려던 사람들이 있었잖아. 내가 또 같은 방식으로 다루기 싫어.”
서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건 고마운데, 나를 유리컵처럼 다루진 마. 내가 확인하고 싶으면 확인할 거야. 오늘은 나도 이 사건을 알아야겠어.”
다음 날 오전, 오명숙이 보관한 사진 뒷면의 종이 원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자료가 쓰인 시기를 확정하진 못했지만, 실제로 오래된 종이에 잉크가 스며든 흔적이 있었다. 사진에는 파란 담요의 모서리만 찍혀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른 손 두 개가 작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사진 아래에서 오명숙의 필체와 다른 글씨가 발견됐다.
‘아이 이름은 함부로 읽지 말 것. 먼저 본인에게 물어볼 것.’
그 밑에 두 개의 세모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금속 시계를 꺼냈다. 완전히 같은 표시였다. 강문석이 확대 사진을 보고 말했다.
“보호 절차를 표시하는 모양일 수는 있어요. 다만 같은 사람이 그렸는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때 서아가 사진을 바라보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께 여쭤봐 줄래? 그날 아이가 뭐라고 했는지.”
오명숙은 한참 생각한 뒤 짧게 답했다.
‘그 여자애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서아가 아니라고.’
서아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름이 적힌 종이배와 이름을 부정한 목소리는 서로 맞지 않았다. 그 둘 중 하나가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한참 뒤 서아가 말했다.
“도겸, 어쩌면 그날 내가 한 일은 나를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내 이름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몰라.”
그 순간 낡은 사진 아래에 검은 문장이 떠올랐다.
[1998년 귀가 주체 03: 임시 명의 ‘진서아’]
[실제 주체 이름: 보호를 위해 비공개]
서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화면을 먼저 보지 않고 내 얼굴을 살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해도 좋을지 묻는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무슨 글씨야?”
“이번에는 확정된 이름이 아니야. 임시 명의라고 적혀 있어.”
그녀는 잠깐 안도했다가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그 애가 내 이름을 스스로 골랐는지도 모르겠네.”
“응. 누가 붙였는지도.”
“그래도 좋은 건 있네.”
“뭔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그 애를 없던 사람 취급할 수는 없다는 거.”
나는 서아가 한 말을 수첩에 적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일은 이름표부터 붙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람이 언제 어디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는지, 그 목소리를 누가 가로막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일 것이다.
서아는 오명숙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사건이지만 아직 본인과 관련이 있다고 확정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오명숙은 그 아이가 무사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화가 끝난 뒤 서아는 내게 뜨거운 떡볶이를 사 달라고 했다. 아까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내가 기억하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우리는 늦은 시간 포장마차를 찾아 걸었다.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끝나지 않았어도 오늘의 저녁은 먹을 수 있었다.
서아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면, 그 애한테 다른 이름을 붙여도 될까?”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다시 같은 일을 하는 거겠지.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부터 적어 놓자.” 그녀는 수첩 여백에 빈 네모를 그렸다. 그 아래에는 ‘본인이 원할 때 말할 자리’라고 적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건 때로 이름이 아니라 남겨 둔 공백이었다. 나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앞으로 그 여자아이가 무엇을 원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구의 이름도 새로운 계약에 넣지 않기로 했다. 이름 없는 사람을 빠짐없이 세는 일과, 그 사람의 이름을 우리가 정해 버리는 일은 전혀 달랐다. 서아는 그 차이를 여러 번 강조했다. 나는 나중에 다시 읽을 수 있도록 그대로 적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이름을 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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