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해 동안 일했다면 퇴직금이 얼마일까.
머릿속으로 숫자를 굴리다가 그만뒀다. 아버지에게 그런 돈을 받을 권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시간을 몰래 장부에 넣어 이자를 불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06:00:03.
식탁과 현관 사이의 세 걸음이 길어졌다. 벽지는 색이 바래더니 연한 아이보리색 병원 타일로 바뀌었고, 아파트 비상구 표시 위에 ‘야간 원무과’라는 글씨가 겹쳤다. 나는 어머니를 뒤로 물렸다. 물리적인 변화인지 시간의 투영인지 아직 구분할 수 없었다.
“엄마, 바닥에 손대지 마세요. 우선 여기 계세요.”
“도겸아, 저기 사람이 있어.”
복도 끝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흰색 가운 위에 검은 카디건을 걸쳤고, 배가 조금 나온 금속 컵을 들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본 스물여덟 해 전의 어머니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지금 내 옆에 선 어머니가 다른 사람처럼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복도 속 여자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분명 나와 닮은 표정이었다.
“엄마, 저 사람이 보여요?”
“응. 나네.”
그녀는 놀라기보다 슬퍼 보였다.
“그날의 나야. 누가 자꾸 집에 가지 말라고 해서, 집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어.”
복도 속 여자가 입을 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벽에 희미한 문장이 나타났다.
[윤혜정 — 06:00 출석 확인 요청.]
나는 휴대전화로 상황을 촬영했다. 화면에는 우리 집 현관과 평범한 신발장이 담겼다. 초점은 안정적이었다. 병원 복도는 사진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보는 것이 영상으로 남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이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증거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보이는 것을 자신의 말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내가 말하기 전에 복도 속 여자의 카디건 색깔과 금속 컵의 찌그러진 부분을 말했다. 내가 봤던 것과 일치했다. 다만 둘 다 같은 장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으니 독립된 증명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유나의 목소리가 이어폰에서 들렸다.
“지금 본인이 어느 시간에 있는지 확인해.”
“2026년 오전 여섯 시 삼 분입니다.”
“알겠어. 어머니는?”
어머니가 직접 말했다.
“집이야. 내 아들 옆에 있어. 저 복도에도 내가 보이지만, 나는 여기에 있고 싶어.”
그때 오른쪽 벽에 출석 도장이 나타났다.
[본인 응답 불명. 대리 근무 처리 시작.]
“방금 대답하셨잖아!” 내가 소리쳤다.
“시스템은 현실의 음성을 받는 창이 없나 봐.” 유나가 말했다. “자기한테 입력된 방식으로만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거지.”
현관문 손잡이가 병원 출입문 손잡이로 바뀌었다. 복도 안쪽의 젊은 어머니는 문턱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남자의 몸은 그림자처럼 흐릿했지만 셔츠 주머니에 달린 이름표는 또렷했다.
한정호.
나는 이름을 읽고도 곧장 그가 실제 한정호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지난번 0번 보관실의 접속 기록에도 그의 이름이 나타났지만 누가 계정을 사용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자가 출석 도장을 들었다.
‘쿵.’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종이 위의 이름이 바뀌었다.
[윤혜정 — 무응답]
[차정수 — 대리 출석 처리]
[청구 시간 — 28년 4개월 13일]
어머니가 비틀거렸다. 나는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런데 방금 아버지 목소리가 기억났다가 없어졌어.”
그녀가 울먹이며 웃었다.
“이상하지? 뭘 잊었는지도 알 것 같아서 더 속상해.”
나는 처음으로 기계를 바로 부숴 버리고 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그림자의 손에서 도장을 빼앗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손잡이에 얽힌 어떤 시간 안에 사람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지금 부수면 젊은 어머니의 형상만 사라질지, 우리 집 어머니에게 남은 기억까지 건드릴지 알 수 없었다.
그림자의 오른손이 보였다. 검은 반점이 손등에 있었고 손톱은 깨끗했다. 실제 사람의 손일까. 나는 주변의 물체가 가려질 때 윤곽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폈다. 접힌 코트와 신발장 사이에서는 모습이 끊어졌다. 완전한 현실 물체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젊은 자신의 얼굴을 한참 지켜봤다.
“저 사람 눈이 많이 겁먹었네.”
“엄마가 맞아요?”
“맞는 것 같아. 그래도 저 아이를 혼자 두고 온 게 아니면 좋겠어.”
“어떤 아이요?”
어머니는 대답을 고르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현관 벽에 비친 그림자는 멈춰 있었다. 현재의 어머니와 복도 속 사람이 똑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수첩에 적었다. 한 사람이 과거로 돌아갔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애 하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고, 다른 애는 안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밖에 나온 애만 보느라 안의 애가 어디에 있었는지 몰랐어.”
“그건 기억인가요, 지금 보이는 걸로 떠오른 생각인가요?”
“둘 다 섞인 것 같아. 네가 안 물어봤으면 구분하지도 않았을 거야.”
나는 그 말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사건의 빈칸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눈앞의 사람에게 무리한 확답을 요구하게 된다. 어머니는 나보다 먼저 그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때 현관 맞은편의 구식 공지판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거기에는 ‘교대자의 미응답은 동의로 본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강문석에게 화면을 읽어 주자 그는 잠깐 침묵했다.
“그 조항은 원본에 없습니다. 예전 문서에는 응답이 없으면 절차를 보류한다는 문장만 있었습니다.”
“누가 바꿨죠?”
“그 문서가 변경된 시점은 추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사용자를 단정하면 안 됩니다.”
나는 부서진 규칙을 당장 고치고 싶었다. 그러나 장치 전체의 운영권을 내게 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있었다 해도, 그 권한으로 다른 사람의 선택을 대신해 버리면 오늘의 나는 구태형과 다르지 않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내가 오늘 한 말은 적어 두고.”
나는 그녀에게 ‘내가 원할 때는 녹음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도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금은 남기겠다고 했다. 그 결정이 얼마나 평범한 것인지 알기에 더 소중했다.
나는 손을 내렸다.
“다시 물어볼게요. 본인의 이름을 빌려주는 데 동의하셨어요?”
“아니.”
“그럼 그 말을 남기겠습니다.”
녹음 앱을 켜서 어머니의 동의를 받은 뒤 현재 시각과 진술을 기록했다. 남 형사에게 원본 녹음의 보존 절차를 문의했다. 변호사나 형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머니가 직접 정하게 했다.
그 사이 서아가 보내 준 메시지가 도착했다. 시우데이터의 실제 출입 장치는 격리됐지만, 출근망의 관리 화면에는 벌써 한시우의 이름으로 승인 요청이 올라온 상태였다. 그녀는 실제 출입 기록과 화면 기록을 분리해 놓은 뒤 협조 가능한 담당자의 진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직 이 사람이 병원에 출근했다는 증거는 없어. 승인 표시만 보이는 거야.’
그 문장이 마음을 붙잡았다. 시스템은 ‘출근’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과정을 끝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동안 현실의 어머니는 한 발짝도 출입문을 넘지 않았다.
나는 거실 바닥에 테이프 한 줄을 붙였다. 현재의 어머니가 서 있는 위치와 복도 속 젊은 여자가 서 있는 위치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그걸 보더니 웃었다.
“너 어릴 때도 바닥에 선 긋는 걸 좋아했어.”
“제가요?”
“어디까지 장난감 자동차가 갈 수 있는지 보겠다고 바닥에 길을 그렸지. 그런데 자동차는 항상 선 밖으로 나갔어.”
“이번에도 선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게 있네요.”
“그래도 사람은 선 안에 가둬 놓으면 안 되지.”
그녀는 자기 발을 뒤로 옮겼다. 젊은 어머니의 그림자는 여전히 복도 끝에 남아 있었다.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두 형상이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강문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겸 씨, 장치에서 실시간으로 숫자가 늘어납니다. 과거 근무를 지금 청구하는 방식이에요. 실제로 이십팔 년의 시간이 흐르는 건 아닙니다. 기록상 정산의 범위를 그렇게 산정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의 일이면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끝난 것으로 처리하지 않은 채 오늘의 대리 근무에 연결해 놓았습니다. 과거 미결 항목을 현재 사람에게 배당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래 묵은 일을 남의 월급에서 빼는 것보다 더하네요.”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출석 확인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의 사람에게서 기억을 가져갈 수 있어요.”
“어떤 기억?”
“마지막으로 안전하게 집에 돌아온 순간, 그런 종류의 기록입니다.”
그 설명을 듣자 몸이 서늘해졌다. 사람을 출근시킬 때 왜 귀가 기억을 뺏는가. 시스템은 출근과 퇴근을 따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이전 근무가 끝났다는 증명을 지워 다음 출근이 영원히 가능하게 만드는 셈이었다.
“이러면 출근망에 잡힌 사람은 평생 퇴근을 못 했다고 기록되겠군요.”
“기록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이미 회사마다 기억 누락 신고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아가 지역 현장 메시지를 읽었다. 서울의 야간 배송기사 한 명은 분명 집에 돌아와 잤는데 아침 단말기에는 ‘연속 근무’라고 떴고,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의 색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한 명은 아침 인사를 나누었지만 배우자의 목소리를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두 사람의 건강과 실제 이동 여부부터 확인해야 했다. 이 현상이 출근망 때문인지도 아직 조사 중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휴대전화 사진첩을 열고 아버지의 사진을 천천히 넘기고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뭐라도 기억나요?”
“그 사람은 손목시계를 거꾸로 차곤 했어. 일이 늦어지면 집에 갈 시간을 보기 싫어서.”
나는 낡은 시계를 꺼냈다. 아버지의 물건이었다. 시곗바늘은 오래전 멈춰 있었다. 그런데 뒤집어 보니 뚜껑 안쪽에 처음 보는 자국이 있었다. 두 개의 세모와 작은 점 하나.
[거부 기록이 사라지면 세 번째 증인을 찾을 것.]
금속 표면에 글씨가 긁혀 있었다. 전에는 어디에도 없던 글씨였다. 어머니는 그 글을 오래 들여다보다 말했다.
“이거 네 아버지 글씨야. 종이에 쓰면 지워 버리니까 금속에 새긴 거야.”
그때 현관의 병원 복도가 한 번 흔들렸다. 그림자 속 남자가 손을 들어 마지막 도장을 찍으려 했다.
[출석 확정까지 00:45]
나는 손목시계를 쥐었다. 세 번째 증인이 누구인지 찾기까지 남은 시간은 마흔다섯 초였다.
제6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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