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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6화
PAYLUA ORIGINAL · 제6화

6화. 기억을 보관하는 서랍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074자

오프라인 책장
사람을 협박할 때에는 적절한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돌려주세요’와 ‘반납해 주세요’는 비슷해 보이지만, 듣는 사람에게 주는 효과가 완전히 다르다. 특히 뇌 속에 있던 기억을 반납하라는 말은 상당히 불쾌했다. “제 기억이 대여품입니까?” 검은 우산의 남자는 정중했다. 너무 정중해서 더욱 수상했다. “대여라기보다는 선불 처리된 계약의 대가입니다. 고객님은 여섯 번의 재진입 동안 유예된 비용을 정산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약서는 보여 주셔야죠.” “고객님이 직접 작성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미친 상태였다는 가능성은?” “판단 능력에 관한 이의 제기는 담당 부서로 제출하시면 됩니다.” 공포보다 더 큰 감정이 올라왔다. 어째서 이세계의 악당까지 관료주의를 배워 온단 말인가. 유나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도겸. 서랍을 열어.” 내 이름이 적힌 서랍은 이미 열려 있었다. “뭐가 없는데요.” “카드 뒷면.” 손에 들린 카드는 차갑고 무거웠다. 표면에는 숫자나 바코드가 없었다. 왼쪽 가장자리만 빛을 받으면 유난히 희게 보였다. 한 번 사용된 카드라는 뜻일까.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오래된 흉터처럼 얕은 패임이 느껴졌다. 유나가 작게 말했다. “전에 네가 이걸 읽고 울었어.” “제가요?” “기억 못 하겠지. 그게 제일 화가 나.” 나는 카드를 뒤집었다. 조그만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전에 들은 경고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고 믿는 내가 그 카드의 질감을 기억하는 듯했다. 카드 모서리의 흠집이 손가락에 닿자 가슴 깊은 곳이 아팠다. 내가 이곳에서 누군가와 다투었을까. 혹은 이 카드를 쥔 채 누군가를 놓쳤던 걸까. 나는 질문을 접고 글자를 읽었다. [본인 인증: 최초의 기억을 말하시오.] 최초의 기억. 어릴 때 장난감 자동차를 망가뜨린 일? 첫 학교? 어머니의 손? 내 기억은 빈 곳이 너무 많았다. “차도겸 씨. 제한 시간이 끝나 가고 있습니다.” 검은 우산의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손에 들린 종이들이 공중에 펼쳐졌다. 종이마다 내가 겪은 순간들이 움직이는 그림처럼 비쳤다. 열 살 바닷가, 열여섯 번째 생일, 목소리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얼굴. “우리 고객님께서 최근 반납하신 항목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이건 보존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종이가 움직였다. 거의 닿을 뻔한 순간, 유나가 내 손을 쳤다. “가져오면 안 돼. 저건 미끼야.” “엄마 목소리인데.” “그걸 되찾으려다가 다른 걸 전부 뺏길 수 있어.” 검은 우산의 남자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서둘러야 하는 것은 나와 유나뿐이었다. 우리는 시간을 잃고 있었고 그는 그 시간의 바깥에서 일하는 직원 같았다. “혹시 영업시간 있습니까?” 내 질문에 유나가 눈을 흘겼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직원이 퇴근하려면 고객 상담을 끝내야 하잖아요. 저분의 상담을 길게 끌면 어떨까 해서요.” 검은 우산의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본 업무에는 근무시간 제한이 없습니다.” “노동청에 신고해야겠네.” “외부 행정 기관에는 귀속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악덕 기업이 원할 만한 답이었다. 나는 그와 대화를 이어 가며 선반의 이름표를 살폈다. 사람마다 같은 형식의 코드가 붙어 있었지만 일부 카드에는 붉은 도장이 있었다. ‘이관 완료.’ ‘반환 심사 중.’ ‘보관자 미상.’ 김태오의 이름표는 ‘이관 대기’였다. 진서아는 ‘원본 보관’으로 표시됐다. 오재민의 것에는 ‘보관자 미상’이 찍혀 있었다. 분명 살아 있다면 어째서 보관자가 없는 걸까. 나는 유나에게 속삭였다. “서아 씨는 여기에는 없네요.”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안쪽에 있으니까.” “기억과 사람을 따로 보관한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이곳은 잃어버린 순간을 떼어내 보관해. 원래는 기억을 되살리려고 만들었어. 그런데 기억을 소유할 수 있게 되면, 그 기억을 가진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바꿀 수 있거든.” “가족여행 기억을 훔쳐서 자기 가족여행이었다고 믿게 만든다?” “그 정도면 차라리 낭만적인 범죄야. 중요한 증언을 없애거나, 누군가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믿게 만드는 데도 쓸 수 있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범인은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증거를 조금씩 없애고 있었다. “그런 걸 누가 허락해 줬죠?” 유나는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가 그 말을 하는 게 웃기네. 처음에는 누구도 허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 어디에도 그 대화는 없었다. 누군가가 여백을 만드는 순간 과거의 책임까지 없어진 것은 아닐까. 갑자기 두려워졌다. 검은 우산이 얌전하게 웃었다.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몸이 먼저 알았다. “저희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관품의 소유권은 명확합니다.” 나는 카드 뒷면을 다시 읽었다. 최초의 기억. 그게 무슨 뜻일까. 내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단정하면 함정일 수 있다. 이곳에서 하는 ‘최초’의 의미가 일반적인 시간 순서와 같다는 보장은 없었다. 문득 녹음기에서 들은 내 목소리가 떠올랐다. ‘시작부터 잘못된 거야.’ “제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기억 말입니까?” 검은 우산이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유나가 낮게 말했다. “계속해.”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 보관소에 처음 들어온 날 제가 본 것을요.” 나는 사진을 꺼냈다. 세 사람이 찍힌 사진. 잉크로 지워진 진서아의 얼굴. “첫 번째 기억은 누군가를 구하려는 이유였습니다.” 서랍 안쪽에서 짧은 금속음이 났다. 바닥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칸이 튀어나왔다. 안에는 낡은 사원증이 있었다. 차도겸. 소속: 시간기록보존연구소. 직책: 기록 복원 엔지니어. 발급일: 7개월 전. “저 회사 직원이었어요?” 유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그리고 보관소를 만든 개발팀의 일원이었어.” 검은 우산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부당 열람. 본인 인증은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서랍이 열렸죠?” 나는 사원증을 가슴에 붙였다. 그 순간 손목시계가 뜨거워졌다. 숫자는 02:08이었다. 그리고 서랍 한가운데에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사용자 권한 복구 중.] 검은 우산의 발치에 있던 실들이 뱀처럼 일어섰다. 유나는 내 어깨를 잡고 옆으로 밀었다. 검은 실이 내 얼굴 옆을 긁고 지나갔다. 실에 닿은 금속 선반은 표면부터 종잇장처럼 벗겨졌다. “복도 끝에 비상문!” 나는 사원증을 잡고 달렸다. 문 앞 단말기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꺼져 있었지만, 사원증을 대자 기계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켜졌다. [차도겸, 관리자 권한 확인.] 문이 열렸다. 우리는 문턱을 굴러 넘었다. 뒤에서 실이 문에 부딪혔고, 금속이 울렸다. 바깥은 서버실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현실의 서버실. 나는 바닥에 누워 거칠게 숨을 쉬었다. “이걸로 끝입니까?” 유나는 웃지 않았다. “끝이면 얼마나 좋을까.” 01:12. “김태오 씨는요?” “서랍에는 없었어. 그 말은 아직 수거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야.” 유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뭉치를 꺼냈다. 나는 언제 가져왔느냐는 말을 삼켰다. 누군가가 전문적으로 물건을 빼내는 것을 보면 질문보다 감사가 먼저 나오는 법이었다. 종이 뭉치에는 이름 서른일곱 개가 적혀 있었다. 날짜는 모두 최근 일 년 안이었다. 마지막에는 김태오와 진서아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 옆에 빨간 글씨가 있었다. [0번 보관실, 이동 대기.] “0번 보관실이 어디죠?” “보관소보다 더 안쪽.” “출입 방법은요?” “네 기억 속에 있었어.” 이쯤 되면 내 뇌는 잃어버린 지하철 교통카드보다 부실한 보관 장소였다. 00:20. 나는 사원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유나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가면 형사부터 확인해. 그 시계를 누가 보냈는지도.” “유나 씨는?” “오늘은 여기까지.” “우리는 다음에 만날 수 있습니까?” “내가 널 찾을 거야. 늘 그랬듯이.” 시간이 돌아왔다. 서버실 기계들이 일제히 윙 소리를 냈다. 열린 문을 지나오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서버실 구조를 살폈다. 바깥에서 보기엔 길이 열 걸음 남짓한 공간이었는데 안에서는 수십 미터를 달렸다. 현실의 거리와 보관국의 거리가 같은 단위가 아닌 것 같았다. 서버 장비 한 대의 일련번호를 수첩에 적었다. 나중에 건물 관리도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찾던 건 초능력의 근거가 아니라 이 현상을 현실에서 설명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증거였다. 유나와 헤어지기 직전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제가 서랍에서 어머니 기억을 꺼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기억에 접속했을 거야. 그리고 너의 다른 기억 하나를 보관국에 넘기는 데 동의한 것으로 처리됐겠지.” “클릭 한 번으로 가입되는 유료 서비스 같군요.” “그보다 나빠. 약관을 읽을 시간이 없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의 주인은 언제나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여기가 시간을 파는 곳이라면 나는 파산 직전의 고객이었다. 시계가 마지막 열 초를 셌다. 나는 0번 보관실의 이름표를 떠올렸다. 그 방에 진서아가 있다면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만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지켜야 할 기억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나는 그런 질문을 머릿속에 적어 두고 다음 날까지 잊지 않기를 바랐다. 밖으로 나오자 남 형사가 계단에서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코피를 닦던 형사는 내 얼굴을 보더니 손목을 확인했다. 시계는 사라져 있었다. “방금…… 분명히.” “형사님. 경찰서로 돌아가세요. 그 시계는 사건 관계 물품이 아니었습니다.” 남 형사는 내 손에 있는 사원증을 보았다. “차 씨, 당신 정체가 대체 뭡니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잃은 기억은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악수하던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손의 온도를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제 그 약속조차 기억하는 문장으로만 남았다. 대신 수첩 맨 뒤에 한 줄이 더해져 있었다. ‘0번 보관실이 열리면 진짜 차도겸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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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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