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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3화
PAYLUA ORIGINAL · 제53화

53화. 사라진 퇴근 기록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121자

오프라인 책장
“목격자.” 나는 화면의 작은 글씨를 두 번 읽었다. 인생을 살면서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은 관리자였고, 나를 가장 많이 구한 사람은 종종 증인이었다. 프로그램에도 그런 역할이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증인 등록 창이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었다. 수진이 물었다. “이런 걸 왜 숨겨 놨을까요?” “안 쓰게 하려고요. 있긴 있다고 말해야 나중에 항의가 들어왔을 때 책임을 피할 수 있으니까.” 유나는 내 수첩을 가리켰다. “아버지가 만든 거부 키. 그게 아직 남아 있지?” 나는 서둘러 단말기의 연결 정보를 적었다. 강문석과 통화하자 그는 원래 프로그램에 ‘본인 거부’와 ‘검증된 입회자 이의 제기’ 경로가 별도로 있었다고 했다. 다만 외부 기기에 그 기능이 노출됐는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접속 주소를 보내 드릴게요.” 내가 말했다. “잠깐. 원격으로 뚫어 볼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단말기마다 연결된 대상이 달라요. 우선 증인이 무엇을 봤는지 명확히 적으세요. 그리고 안전 관리 담당자에게 시험 중단 요청을 남기고요.” 그는 늘 화려한 해결책보다 번거로운 절차를 먼저 말했다. 이전에는 답답했는데, 이제는 그게 누군가를 지키는 방법임을 조금 알았다. 수진은 손을 들었다. “제가 볼게요. 현주 언니가 어떤 버튼을 눌렀는지 옆에서 봤어요. 어젯밤에도 같은 단말기였어요.” “기억나는 만큼만 말해 주세요.” 내가 말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빼고요.” 그녀는 두 손을 무릎에 놓고 천천히 설명했다. 현주는 퇴근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완료’라고 떴다. 별도의 기억 보관 동의는 없었다. 수진 자신도 그때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다만 화면 아래 회색 글씨가 있었는지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쓰면 부족한가요?” “아니요. 모르는 부분까지 아는 척하지 않으셨으니까 오히려 확인할 수 있는 진술입니다.” 유나는 수진의 허락을 받아 음성 내용을 현장에서 받아 적었다. 안전관리자도 장치가 직원들에게 어떤 설명으로 설치됐는지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했다. 장비 판매사의 승인 기록과 다르게 실제 현장 설명은 ‘근태 관리 단말기 개선’뿐이었다. 우리는 단말기 메뉴에서 ‘안전 이의 제기’를 찾았다. 관리자 비밀번호를 우회할 필요는 없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쌀알만 한 물음표가 있었고, 그곳을 눌러야 숨은 메뉴가 열렸다. 나는 혀를 찼다. “우리 회사 사용자 경험 담당자가 보면 기절하겠네요.” “그쪽도 기절할 자격이 있나?” 유나가 물었다. “없죠. 우리 프로그램도 오류 메시지가 ‘잠시 후 다시 시도’뿐이거든요.” 서류를 한 줄씩 입력했다. 현주의 근무 시간, 수진이 확인한 사실, 현장 관리자가 제공한 공지문 번호. 증거를 표시한 뒤 마지막 창에서 멈췄다. [이의 제기 결과를 현장 당사자에게 우선 설명했습니까?] 현주는 여전히 손가락을 올린 채 굳어 있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분명한 답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예’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현장 설명 시도, 대상 반응 확인 불가’를 선택했다. 그 항목도 있었다. 아주 깊은 곳에. [임시 정산 보류 요청 접수.] 검은 글씨가 현주의 손목에서 한 글자씩 물러났다. 나는 입을 열고 숨을 내쉬었다.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글씨가 돌아간 건, 우리가 누군가의 몸이 아니라 절차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17:46:13. 현주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수진이 그녀를 붙들어 벽 옆 의자에 앉혔다. 현주는 구토할 것 같다고 했고 안전관리자는 즉시 의료 지원을 요청했다. 나는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기 전까지 기억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 퇴근했어요?” 그녀의 첫 질문이었다. “아직요. 지금은 잠깐 앉아 계세요.” 수진이 말했다. 현주가 눈을 감았다 뜨자 손목의 검은 선이 옅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강문석이 화면 공유를 통해 확인해 줬다. “정산 보류만 됐습니다. 가져가려던 기억이 원래대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어요. 현재 남아 있는 항목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현주가 가방에서 아들의 그림을 꺼냈다. 아들이 생일날 어떤 말을 했는지는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 그림을 다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림이 있다고 사라진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현주가 회복실 의자에 앉자 안전관리자는 근태 처리 안내문을 읽어 주었다. 회복하는 동안 누가 대신 퇴근 처리를 해도 되는지 물었지만, 현주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가 제 기록을 보고 싶어요. 뭘 눌렀는지 모르겠으면 다시 설명해 주세요.” 그녀는 천천히 자기 사원번호를 말했다. 그리고 화면에 표시된 숫자가 그 번호와 다르다는 걸 확인했다. 나는 기계가 알려 준 값을 지우지 않고 사진과 출력물로 각각 남겼다. 누군가에게 잘못된 기록을 보여 주는 일은 불편하지만, 그 기록이 어디서 바뀌었는지 확인하려면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수진이 말했다. “현주 언니가 아들 얘기를 자꾸 하니까 내가 괜히 울고 싶네.” “울어도 돼. 근데 지금은 물 좀 더 줄래?” 현주가 대답했다. 수진은 코끝을 훔쳤다. 정말로 울기 전에 물부터 가지러 갔다. 나는 두 사람에게 설명을 잠시 멈췄다. 누군가의 인생이 지워지는 사고를 해결하는 방법이 대단한 천재의 번뜩임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현실의 첫 단계는 대개 의자, 물,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말을 듣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 현장 관리자는 단말기 설치 업체에 통화한 내용을 기록했다. 업체는 ‘서버에는 이상이 없다’고 답했다고 했다. 어디선가 이미 수십 번 들었던 말이었다. “서버가 정상인 게 직원이 정상이라는 뜻은 아니죠.” 내가 말했다. 안전관리자가 이마를 문질렀다. “그럼 정확히 뭘 확인하란 말입니까?” “이 직원이 오늘 근무했다는 증거와, 직원이 실제 동의한 범위를요. 서버 상태는 그다음입니다.” 그는 한참 침묵하더니 종이 출입대장을 가져왔다. 직원들은 언제부턴가 그 장부를 구식이라며 비웃었다고 했다. 오늘만큼은 모두가 그 낡은 종이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잠시 뒤 남 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경찰이 확보한 납품 관련 서류에 따르면 부산 센터의 장비 설치 기록은 정상인데, 도겸이 승인자로 표시된 로그는 별도 외부 서버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지만 최소한 회사 내부 승인 절차와 동일한 기록은 아니었다. “그럼 다행인가요?” 내가 물었다. “아직은요. 차도겸 씨 이름이 도용됐다는 정황이 하나 더 생긴 겁니다. 이걸 가지고 다른 직원 피해를 막는 근거를 확보해야죠.” 나는 수첩에 그 말을 적었다. ‘정황’과 ‘사실’을 섞지 말 것. 내 기억이 불안정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사실까지 함부로 정리할 수는 없었다. 그때 센터 전산 담당자가 뛰어왔다. “근태 시스템에서 현주 씨 기록이 사라졌습니다.” 수진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이에요? 방금까지 여기 있었잖아요!” “사람은 있는데, 이번 달 근무일 수가 0으로 나와요. 급여 계산 대상에서도 제외됐어요.” 나는 전산 화면을 확인했다. 근무자 목록에서 민현주의 사원번호가 사라진 자리에 동일한 규격의 숫자가 있었다. [임시 기록 대체자: 차도겸-03] 이번에는 이름뿐 아니라 급여와 근무 시간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위험한 것은 기억 징수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노동을 증명하는 기록까지 빼앗을 수 있는 구조였다. “원장부가 따로 있겠죠?” 내가 물었다. 관리자가 종이 근무표와 출입문 통과 기록을 가져왔다. 전자 출퇴근 기록과 종이표의 시간이 달랐다. 우리는 어느 쪽이 옳은지 성급히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현주가 실제로 근무했다는 목격과 업무 배정 자료가 남아 있었다. 현주는 자기 사원번호가 사라진 화면을 보더니 의외로 조용했다. 분노하는 사람은 대부분 소리를 높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먼저 월말 대출 자동이체 날짜를 떠올렸다. “제가 이번 달에 일을 안 한 걸로 되면 월급도 안 나오는 거예요?” 안전관리자는 급여 정산 전까지 별도 근무 확인 자료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확답할 수 없는 부분은 담당자가 확인해 답하겠다고 말했다. 수진이 종이 근무표를 펼쳤다. “언니 지난주 수요일에도 나랑 야간 했잖아. 포장 라인 기계 고장 나서 한 시간 늦게 퇴근했잖아.” 현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산 화면에는 근무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노트에 썼다. ‘기록이 틀렸다고 해서 실제 일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사실을 믿어 달라고 하는 일과, 실제로 증명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다르다. 우리는 후자를 해야 했다. 수진은 진땀을 흘리며 웃었다. “현주 언니는 출근해서 일을 했는데 시스템에는 일을 안 한 사람이 됐네요. 저런 걸 프로그램이라고 팔아요?” “프로그램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하는데, 사람을 프로그램에 맞추려고 하면 이렇게 됩니다.” 말을 하는 동안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서아였다. “도겸, 대전 쪽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 아직 시작 시각이 아닌데 사원번호가 대체됐어.” “19시 11분 장비요?” “응. 더 이상한 건 대체자야.” “차도겸이라고 나오죠?” “아니. 이번에는 진서아라고 나와.”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부산 센터에는 정상적인 오후 햇살이 비쳤다. 하지만 멀리 있는 대전의 퇴근 기록은 이미 지워지고 있었다. 서아가 낮게 말했다. “이 시스템은 승인자를 훔치는 게 아니야. 책임을 떠안을 사람을 골라서 이름을 붙이는 거야.” 그때 부산 단말기가 다시 켜졌다. [부산 경로 03: 정산 보류.] [대전 경로 07: 책임자 교체 완료.] [전체 경로 공동 담보 계약 대기.] 전산 담당자는 당장 모든 시스템을 이전 상태로 돌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기록을 덮어쓰면 누가 언제 값을 바꿨는지 찾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우리는 원본과 현재 값을 각각 보존하도록 요청했다. 현장 관리자는 부정확한 급여 자료를 확정하지 않고 담당 부서에서 별도로 확인하겠다고 했다. 현주는 창가에 서서 한참 바깥을 바라봤다. 안전 구역에서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는 걸 보는 것만으로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이번 사고가 전산실의 숫자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서류를 한 장 더 꺼냈다. 종이의 상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사람의 퇴근이 다른 사람의 빚이 되지 않게 할 것.’ 아버지 차정수가 남긴 문장이다. 이제 그 문장을 전국에서 지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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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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