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두 시 십분이었다.
유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게 물었다.
“기억 괜찮아?”
“부산이 어디 있는지는 압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나는 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첫 장을 보여 줬다. 내 이름, 오늘 날짜, 부산에 온 이유, 함께 온 사람들. 잊은 기억은 되돌릴 수 없지만 잊을 가능성에 대비할 수는 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준비를 패배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요즘은 생존 기술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같이 확인해 줘요.”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도착한 물류센터는 바닷바람이 닿는 산업단지 안에 있었다. 회색 건물에는 일정 간격으로 하역문이 열려 있었고, 컨베이어 벨트가 사람 키보다 높은 상자를 줄지어 실어 나르고 있었다. 차량은 끊임없이 들어왔지만 현장 입구의 보행자 통로는 좁았다.
권수진은 정식 방문 절차를 안내했다. 센터 안전관리자가 우리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우리는 작업장에 무단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안전관리자는 처음엔 퇴근망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가, 협력업체에서 설치한 단말기라고 하자 표정을 굳혔다.
“단말기 교체는 승인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기억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유나가 물었다.
“장비 테스트는 오늘 몇 시죠?”
“퇴근 처리 배치가 다섯 시 사십이 분이니까 그때겠죠. 그런데 이미 하루 종일 입출고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테스트가 위험하다면 멈출 수 있어야 하는데요.”
그는 현장 관리자와 협의해 시험 구역의 하역 작업을 일찍 종료하기로 했다. 단말기 전원을 무작정 끊지는 않았다. 장비가 무엇과 연결됐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원을 차단하면 이미 등록된 작업자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오후 세 시 삼십분, 수진이 휴게실로 우리를 불렀다. 커피 자동판매기 앞에 젊은 직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반창고를 붙인 손으로 컵을 돌리고 있었다.
“민현주 씨예요.” 수진이 소개했다. “어제 야간조에서 퇴근 처리한 뒤로 자꾸 이상한 말을 해요.”
현주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제가요?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말씀해 주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퇴근 버튼을 눌렀는데 집에 가는 길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버스는 탔대요. 교통카드 기록도 있어요. 근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생각이 통째로 없어요.”
“평소 피곤할 때도 그러십니까?”
“아뇨. 진짜 이상한 건 다른 거예요. 우리 아들이 어제 제 생일이라고 그림을 줬거든요. 그림은 갖고 있는데, 아들이 제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서툴게 그린 케이크와 세 개의 사람 모양. 한쪽 구석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엄마, 오늘도 같이 저녁 먹자.’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소중한 기억이 사라지는 일을 겪은 사람이 얼마나 억울한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그 경험이 퇴근망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증상이 계속되면 의료진에게도 확인받으세요. 저희가 확인하는 시스템 문제와 건강 문제는 따로 살펴야 합니다.”
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자신의 단말기 화면 사진을 보여 줬다. ‘간편 퇴근’ 버튼 아래에는 크기가 작은 회색 영역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누르면 숨은 약관이 펼쳐졌다.
[참여자의 잔여 근무 감각을 보관하여 퇴근 만족도를 향상합니다.]
나는 문장을 읽고 기가 막혔다.
“근무 감각이라는 건 무슨 단위로 재죠? 킬로그램? 분당 피로도?”
“그걸 알아내려고 온 거잖아.” 유나가 말했다.
우리는 버튼을 눌러 시험하지 않았다. 현주와 수진에게도 사용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의 동의를 받아 이미 저장된 화면과 근태 기록의 시간대를 대조했다. 기록에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퇴근 완료 시각 직전에 ‘대리 처리 승인’이라는 항목이 추가돼 있었다.
“누가 대신 승인했죠?” 수진이 물었다.
“표시된 이름은 차도겸입니다.”
“또?”
“제 이름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이 사람들은.”
그 순간 부산 바닷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아직 네 시였다. 우리가 찾아온 원인을 확인할 시간은 남아 있었지만, 데이터 안에는 새 장치의 실행 예약이 이미 걸려 있었다.
사무실에서 시험 중단 여부를 논의하는 동안 현장 반장이 들어왔다. 그는 팔뚝에 낡은 흉터가 있었고 누가 봐도 오늘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물건은 어떡합니까? 오늘 출고 물량이 아직 절반이나 남았는데요.”
안전관리자가 답했다.
“시험 구역의 하역만 중지합니다. 나머지도 위험하면 추가로 멈출 거고요. 사람을 안에 두고 실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참여하는 건지도 오늘 들었어요.”
그 말에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요. 저희는 편리한 퇴근 등록을 한다고 들었어요. 누가 우리 기억까지 가져간다는 설명은 없었어요.”
반장은 현주의 그림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를 미신처럼 생각했지만, 자기 부하 직원이 집에 가는 길과 아이의 말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동료가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답했다. “그래서 의료 진료와 시스템 검증을 따로 진행하는 거예요. 지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동의하지 않은 작업자를 실험에 참가시키면 안 된다는 것뿐입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모자를 벗었다.
“그럼 제가 교대조에 알리겠습니다. 시험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않도록요. 다만 오늘 일한 시간은 반드시 남겨 주세요.”
“그건 별도로 확인하겠습니다.” 안전관리자가 대답했다.
회의가 끝난 뒤 수진은 현주에게 종이컵에 담긴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현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너까지 괜히 일 커지게 하는 거 아냐?”
“언니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이상한 기계가 왔으면 먼저 확인해야지.”
“나 오늘 집에 가면 애가 기다릴 텐데.”
“그러니까 집에 가야지. 일한 기록도 갖고.”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수첩에 옮겨 적지는 않았다. 당사자의 허락 없는 사적인 대화를 증거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듣고서야 이 실험이 단말기 앞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게 됐다.
오후 다섯 시 사십분. 물류센터는 위험 작업을 중지했고 직원들은 안전 구역으로 이동했다. 퇴근망 단말기가 있는 출입구 앞에는 관리자와 희망하는 직원 대표만 남았다. 나는 낯선 장치의 화면을 촬영할 수 있는 범위만 확인했다. 경찰을 통해 정식으로 확보할 자료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보존할 자료를 구분했다.
17:41:58.
장비 화면에 글씨가 나타났다.
[시범 운행 준비. 대상 경로 03.]
17:42:00.
창밖의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정확히는 시험 구역 안에서만 그랬다. 옆 건물 창문에는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먼 도로에서는 차들이 정상적으로 달렸다. 전 세계가 멈춘 건 아니었다. 한 구역만 현실에서 잘라낸 것처럼 정지한 상태였다.
그런데 내 발밑의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였다.
“유나 씨?”
“나도 움직여.”
현장 관리자는 벽에 기대 선 채 눈을 깜박였다. 수진도 움직였다. 하지만 단말기 앞에 있던 직원의 손은 화면에 닿기 직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 사람만 정지 경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수진이 이름을 불렀다.
“현주 언니?”
민현주의 손끝에서 검은 글씨가 자라났다. 그 글씨는 장갑을 따라 손목까지 올라왔다.
[퇴근 정산 대상 확인.]
[기억 잔액 인출 대기.]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유나가 내 팔을 막았다.
“그냥 떼면 기록째 끌려갈 수 있어. 대상 권한부터 확인해.”
내 시계는 17:42를 표시했지만, 평소 여섯 시 정지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보관국이 외부에 만든 좁은 실험 구역이었다. 내가 손을 뻗어 글씨를 지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현주의 승낙 기록을 확인했다. 화면 속 승인 시간은 어젯밤이었다. 그런데 직원 본인이 확인한 건 퇴근 완료 버튼뿐이었다. 대리 승인 항목을 열자 ‘차도겸’이라는 계정으로 입력된 서명이 나타났다.
“이건 제 서명이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증명할 수 있어?” 유나가 물었다.
“당장 이 화면에서요? 아니요. 하지만 제가 어제 어디에 있었는지 다른 증거들이 있어요.”
사람이 위험할 때 가장 답답한 것은 올바른 말만으로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수진이 현주에게 다가갔다. 굳은 손가락을 억지로 잡지 않고 얼굴 높이를 맞췄다.
“언니, 들려? 우리 여기 있어.”
현주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몸은 멈췄어도 아주 작은 반응이 있었다.
그때 단말기가 새로운 선택지를 띄웠다.
[대리 관리자에게 기억 담보를 청구합니다.]
[청구 명의: 차도겸.]
내 손목에서 익숙한 검은 선이 떠올랐다. 내가 서명하지 않은 계약이 내 기억을 가져가려 했다.
“허허. 남의 퇴근 버튼을 제가 결제하게 생겼네요.”
유나는 웃지 않았다.
“이건 함정이야. 도겸 씨가 대신 내면 다른 지역에서도 똑같이 청구할 수 있어.”
나는 버튼에서 손을 뗐다. 현주를 구하기 위해 나의 기억을 아무렇게나 넘기면, 시스템이 같은 짓을 계속할 이유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수진은 휴게실 벽의 비상전화로 안전관리자를 불렀다. 실험 구역 밖에서 정상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관리자는 출입 통제를 유지했다.
유나는 수진에게 안전 구역 밖으로 물러나도 된다고 다시 말했다. 현주에게 말을 건네는 것조차 위험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장치에 손대지 않고 곁에 있겠다고 했다.
“그럼 여기서 뭘 해 주면 좋을까요?” 수진이 물었다.
“나중에 언니가 돌아왔을 때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수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멈춘 사람 옆에서 기다리는 일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단말기에 남은 시간이 표시됐다.
[임시 보류 가능 시간 00:09:59.]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가 있었다.
[정산 거부 사유 입력: 본인 또는 검증 가능한 목격자.]
내가 찾던 것은 퇴근 버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돈처럼 빼앗을 때, 그 사람이 거부할 수 있는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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