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가 보내온 서류의 첫 장에는 '수탁 확인서'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모니터에 문서를 펼쳤다. 평범한 전자계약서였다. 수탁자 진서아, 위탁자 차도겸, 위탁 목적은 1998년 관측 로그의 무결성 보전. 일곱 달 전에 서명했고 유효 기간은 '본인 해지 요청 시까지'였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문서의 마지막 조항이었다.
'수탁자는 원본 관측 기록에 속한 시간 전체를 인계받는다.'
서아가 전화로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을 본 적 없어."
"모를 수 있죠. 저도 예전에 약관을 끝까지 읽지 않은 적이 있고요."
"아니, 이건 그 문제가 아니야. 내가 서명했을 때 열람한 문서에는 '원본 관측 기록의 복제본을 보관한다'고 돼 있었어. 시간이 통째로 넘어온다는 건 계약서에 없었어."
나는 이전 버전과 현재 버전을 비교했다. 원본 서명의 암호학적 검증은 통과했다. 서명 자체가 위조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서명한 문서가 지금 화면에 나온 문서와 같다는 뜻은 아니었다. 중간 참조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계약서 파일을 바꾼 게 아니라, 서명한 계약서가 가리키는 '부속 설명서'를 바꿨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예를 들면 A라는 문서에 서명했는데, A가 링크하는 B 문서를 관리자가 나중에 바꾸는 거죠. 겉으로는 A의 서명이 여전히 유효해 보입니다."
"사람이 읽었던 내용은 바뀌었는데 서명만 남는구나."
"맞아요. 제일 나쁜 형태의 업데이트입니다."
기혁 형사는 관련 서버 기록을 확보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우리는 서아가 보존했던 당시 열람 화면과 화면 기록을 대조했다. 남 형사가 확보한 자료 목록에는 서아가 계약을 확인하고 '복제본 보관만'이라는 문구에 동의한 시각이 적혀 있었다. 현재의 '시간 전체 인계'와는 다르게 보였다.
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내가 잘못 서명해서 애가 갇힌 게 아니었어?"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확인해야겠지만, 적어도 이 변경은 당신이 읽은 조항과 다릅니다."
"나는 일곱 달 동안 그 생각을 했어. 내가 무언가 잘못 눌러서 네 기억이 사라지고 아이가 갇혔다고."
나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서아가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만 나타나는지, 내 옆에 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의 시간을 맡은 죄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서아 씨. 계약서가 왜 바뀌었는지 증거로 확인합시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 당신이 계속 혼자 갇혀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한참 뒤 그녀가 물었다.
"도겸, 내가 그날 널 말리지 못해서 미안해."
"기억이 없어서 어떤 일이었는지 아직 잘 몰라요. 다만 지금 전화해 준 건 고맙습니다."
서아가 흐느낌 사이로 웃었다.
남기혁 형사가 보내온 비교 자료에는 예상치 못한 사실도 있었다. 진서아가 서명한 원래 계약서에는 기록 보관 중인 당사자가 직접 거부 의사를 밝히면 그 의사가 우선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바뀐 부속 문서에서는 거부의 효력을 판단하는 사람이 관리자라고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수상했는데, 이건 완전히 반대네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제가 한시우의 어린 기록을 맡았다고 생각했어." 서아가 대답했다. "그 애가 나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승인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 네가 여섯 번 그 문을 열려고 했다가 실패하니까 그때마다 내가 동의하지 않은 것이 잘못처럼 느껴졌어."
그 말은 내게도 상처처럼 다가왔다.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서 선택권을 빼앗아 놓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죄책감까지 떠넘기는 구조였다. 구태형은 사람의 기억뿐 아니라 미안해하는 마음도 자산처럼 거래하고 있었다.
"그럼 당신이 거부한 적도 있어요?"
"있어. 첫 번째 시도 때. 넌 그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고 나는 문이 안전한지 먼저 확인하자고 했어. 그때 구태형이 내게 '아이를 가둔 책임'이 있다고 했지. 네가 다음 날 나를 기억하지 못하자, 나도 내가 틀린 줄 알았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래된 연인의 다툼처럼 흘려보내기에는 누군가의 삶이 걸려 있었고,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그날의 판단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서아 씨가 왜 거부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습니까?"
"응."
그녀는 휴대전화로 짧은 음성 파일을 보내 왔다. 예전의 서아가 다급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이의 몸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정지 시간이 끝났을 때 돌아갈 장소도 없습니다. 지금 문을 강제로 열면 누가 다치는지 모릅니다. 당사자에게 위험을 설명하고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뒤이어 예전의 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기다리다 또 잊어버리면 어떡해?'
서아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잊어버려도 괜찮아. 우리가 다시 설명하면 돼. 네가 기억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아이한테 서둘러 나오라고 할 수는 없어.'
나는 파일을 껐다. 기억을 잃었던 시절의 내가 얼마나 조급했는지 그 목소리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서아가 위험한 계약을 보관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도 조금 이해됐다. 누군가가 다시 실패하는 걸 막기 위해 기록을 대신 지킨 사람이었다.
"서아 씨."
"응."
"그날 저한테 화 많이 나셨겠네요."
"많이. 네가 밥도 안 먹고 문 앞에서 버티는 바람에 내가 샌드위치 두 개 들고 갔어."
"그건 제가 잘못했네요. 샌드위치는 무슨 죄예요."
서아가 짧게 웃었다. 오래 묵은 죄책감에서 빠져나올 때 반드시 엄숙한 말만 필요한 건 아니었다. 때로는 빵 두 개를 살려 주는 농담 하나가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들었다.
나는 음성 파일을 임의로 다른 사람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 안에는 서아와 과거의 내 개인적인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아가 증거로 사용해도 된다고 지정한 구간만 별도 문서로 정리했다. 그녀의 결정에 따라 형사에게도 필요한 부분만 전달했다. 구태형이 또 '동의가 있었다'고 주장할 때 우리가 보여 줄 것은 과거의 감정 전체가 아니라 그때 실제로 거부했던 조건이었다.
우리는 계약 해지를 바로 누르지 않았다. 서명이 사라지면 현재까지 증명한 기록의 출처도 함께 무효가 될 수 있었다. 대신 서아 본인이 서명하지 않은 조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별도 진술을 등록했다. 이의를 제기했다고 기존 자료를 지울 수 없도록 사본을 형사와 독립된 보존 장치에 나눠 저장했다.
오후 5시 58분. 서아가 다시 전화했다.
"도겸. 오늘은 내가 직접 문 앞에 갈게."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하지 않다고는 못 해. 하지만 더는 내가 가진 증명 키를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아. 유나와 형사님한테도 위치와 경로를 공유할 거야. 내 선택으로."
나는 그녀의 결정을 막지 않았다.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과 대신 결정해도 된다는 생각을 구분하기로 했다.
여섯 시가 되자 보관실 심리장에 서아가 나타났다. 오래전에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몰라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잠깐 발을 멈췄다. 서아는 평범한 검은 후드티를 입고 손목에 아무 장치도 차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어?" 그녀가 물었다.
"제가 기다린 시간보다 당신이 기다린 시간이 길 것 같은데요."
"시간으로 경쟁할 생각은 없어."
그녀가 웃었다.
심리장은 전보다 밝았다. 그러나 서기관이 서류철을 펼치자 천장에서 검은 먼지처럼 작은 글씨가 떨어졌다. 화면을 가득 채운 말은 '기억 보관 동의'였다. 같은 문장이 수백 번 반복됐다. 서아가 한 글자씩 읽으려 하자 글씨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읽을 수 없는 속도로 보여 주고 동의했다고 주장하려는 거군요." 내가 말했다.
서기관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는 본래 심리 절차를 관리할 뿐 계약서 화면 자체를 수정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강문석이 화면 자동 넘김을 끄자 곧바로 관리자 경고가 나타났다. 구태형의 권한이 아직 화면 표시 기능에 남아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하지만 버튼을 마구 누르는 대신 서아에게 물었다.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읽고 싶은지, 지금 계속할지 아니면 중단할지. 서아는 크게 숨을 들이킨 뒤 문장 하나씩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했다.
서기관은 비상 열람 모드로 전환했다. 글씨가 멈췄다. 우리는 문서의 각 페이지를 차례로 넘겼고 서아가 실제로 읽은 범위를 그대로 남겼다. 다 읽지 못한 항목에는 서명을 받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느린 절차였겠지만 그 느림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한 장에 '미귀환 주체의 기록은 복제본 열람만 허용한다'는 문장이 보였다. 서아는 손가락으로 해당 문장을 짚었다. 자신이 처음 동의했던 조항이라고 했다. 나는 강문석에게 문서의 당시 버전을 대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검증을 마치자 동일한 문장의 존재가 확인됐다. 서아의 기억이 혼자 남긴 주장만은 아니었다.
서기관이 원본 수탁 확인서를 펼쳤다. 서아는 인계 대상의 변경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직접 진술했다. 나도 당시 위탁자였다는 이유로 내게 남아 있는 서명 자료를 제출했다. 기억이 없어도 인정되는 자료와 인정되지 않는 자료를 분리했다. 서기관은 두 진술을 대조하더니 문서의 부속 설명서에 외부 관리자 수정 흔적이 있음을 확인했다.
[수탁 범위 분쟁 접수.]
[분쟁 대상의 강제 인계 일시 중지.]
서아는 판정문을 직접 읽고 난 뒤 종이에 자기 이름을 한 번 더 썼다. 누구의 부탁도 받지 않은 서명이었다. 그 글자를 보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서서 선택하는 사람을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잘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서아는 누군가의 계약 부속품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기 이름을 써 내려갈 때 손끝이 떨렸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아주 작은 진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서아의 손목에 생겼던 검은 표시 하나가 옅어졌다.
나는 안도하려다 멈췄다. 여전히 더 큰 질문이 남아 있었다. 누가 부속 설명서를 바꿨는가. 그리고 왜 1998년의 한 시간을 지금 이 사람에게 넘기려 했는가.
서기관은 마지막 장을 꺼냈다.
[보관국 운영권 변경 신청인: 구태형.]
[차기 인수 예정기관: 시우데이터.]
나는 몸을 굳혔다. 한시우가 대표로 있는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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