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집 현관문은 오래된 철문이었다.
손잡이는 몇 번 수리한 흔적이 있었고, 나사 하나는 유난히 반짝였다. 어머니가 직접 문을 열고 손잡이를 가리켰다.
"당신 아버지는 이런 걸 잘 숨겼어요. 장갑 하나 찾으려고 찬장을 다 뒤져도 안 나오던 사람이었죠."
나는 웃음이 났다. 아버지가 남긴 기록이 거창한 비밀처럼 느껴지다가도, 결국 현관 손잡이 뒤에 물건을 숨기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기혁 형사가 봉인 절차를 설명하고 어머니의 동의를 다시 확인했다. 어머니는 손잡이 분해에는 동의하지만 문 전체를 가져가는 건 싫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정확히 기록했다. 형사가 수리업자의 도움을 받아 나사를 풀자 낡은 필름 통만 한 캡슐이 나왔다. 안에는 종이 한 장과 작은 금속판이 있었다.
금속판에는 `WAIT_0`와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종이에는 어머니의 글씨로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에게 선택하라고 묻기 전에, 무서웠냐고 먼저 물어볼 것.'
그 문장을 보자 가슴이 저릿했다. 나는 지금껏 0번 보관실의 아이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그것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아이에게 또 다른 시험처럼 들렸을 수도 있었다. 문 너머의 아이는 어른들이 나타날 때마다 선택하라는 말을 들었을 테니까.
금속판 속에는 숫자 셋이 들어 있었다. 0, 1, 1. 강문석은 그걸 즉시 프로그램에 넣지 않았다. 열쇠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도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문을 열게 될까 봐서였다.
"검증 키가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틀린 키를 넣으면 관리자 승인으로 인식될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만든 건데도요?"
"아버지가 만든 물건과 보관국이 그걸 읽는 방식은 달라졌습니다."
그 말이 옳았다. 나 역시 개발하면서 오래된 데이터의 뜻이 새 프로그램에서 달라지는 사고를 몇 번 겪었다. 이번에는 그 오류로 사람이 사라질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검증 장치를 따로 만들었다.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은 노트북에 원본 프로그램 명세만 넣고 숫자 셋을 대조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0: 현재 선택 보존]
[1: 첫 번째 주체의 의사]
[1: 두 번째 주체의 의사]
나는 조용히 읽었다.
"한 사람의 권한을 두 개로 나누는 키가 아니군요. 처음부터 독립된 두 사람을 전제로 하는 키예요."
강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간이 섞여 보인다고 해서 하나로 합쳐야 할 이유는 없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요구했던 방식이었다.
현관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금속판을 한참 바라봤다. 세 숫자를 읽고도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장치를 봉인하려 하자 작은 손짓으로 불렀다.
"거기 종이에는 왜 아이들 이름이 없어요?"
"사람을 구분하는 키입니다. 이름을 안 써 놓아도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란 걸 확인할 수 있게요."
"좋네요."
어머니는 뜻밖에 웃으셨다.
"내가 요즘 이름을 자꾸 잊으니까 그런지, 이름이 없어도 사람이 있다는 말이 참 좋아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분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어도 설명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이름을 외우는 일이 사람을 대하는 전부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신발장 위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아이들이 갖고 놀던 자석 글자들이 들어 있었다. 알파벳도, 숫자도 섞여 있었고 그중 하나만 다른 색이었다. 파란색의 '0'이었다.
"당신 아버지가 만든 장난감인 것 같아요. 둘이 싸우면 한쪽에 영을 놓고 다시 시작하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둘이라면 누구요?"
"몰라요. 그런데 그때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영은 아무도 없는 자리가 아니라, 다시 고를 수 있는 자리야.'"
어머니가 웃다가 멈췄다.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서둘러 더 떠올려 보라고 하지 않았다. 잊어버린 사람을 붙들고 과거를 캐묻는 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이제 알고 있었다.
나는 자석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문 앞에서 두 아이가 서로를 기다렸다는 사실과 영을 다시 고를 수 있는 자리로 남겼다는 문장, 그 둘이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수학적으로 사람을 나누려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소한 영을 누구의 소유도 아닌 빈자리로 남겨 두려 했다.
기혁 형사는 오후에 어머니가 말한 내용을 '기억 회복'으로 등록하지 않았다. 단지 오늘의 자발적인 발화로 기록했다. 옛일을 확정하지 않는 대신 지금 나온 말을 존중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 서류를 보고 만족해했다.
"경찰분이 말귀를 잘 알아듣네요."
"원래 직업이 그렇습니다." 형사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손님 한 분 더 오셔도 밥은 해 드릴 수 있겠어요."
나는 그분을 말리고 싶다가 그만뒀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할지 말지는 어머니가 정할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혹시 위험한 손님이 오지 않도록 상황을 확인하고, 그분이 원하실 때 멈출 수 있도록 곁에 있는 것이다. 식탁에 빈자리를 남겨 두는 일도 강제가 아니라 어머니 자신의 선택이었으면 좋았다.
오후 여섯 시가 되자 나는 다시 정지 세계에 들어갔다. 오늘은 0번 보관실 문 앞에서 곧바로 이름을 묻지 않기로 했다. 유나가 옆에 섰고, 문 바깥에서는 강문석이 검증 장치를 지켰다.
문은 오늘따라 유난히 낡아 보였다. 나무 표면에 작은 키 표시가 있었고, 그 아래에 오래전 긁힌 자국이 났다. 손가락으로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나는 참았다. 문을 만졌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동의로 처리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유나는 문 앞에 작은 스탠드를 놓았다. 정지 세계에서도 손으로 켜면 불이 들어오는 물건이었다. 온기가 없는 복도에 주황색 빛이 퍼졌다. 강문석은 장치의 상태를 읽고 아이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했다. 적어도 오늘 대화는 누군가의 기억을 대가로 삼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작은 색연필을 꺼냈다. 아이에게 주려고 가져온 건 아니었다. 문 안에서는 물건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대신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무문 바깥에 그림을 그려 보려 했다. 아이에게 어떤 문양을 보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유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네 그림 솜씨로?"
"두 번째 출구의 장식 수준을 미리 낮춰 놓는 겁니다. 나중에 실망하지 않게."
그녀가 작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힘을 얻었다. 그동안 이곳은 늘 공포와 협박으로 가득했지만, 오늘만큼은 누군가가 스스로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는 장소가 됐으면 했다.
"거기 있어?" 내가 물었다.
잠시 뒤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네. 오늘은 안 잊어버렸어?"
"응.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해 놨어."
"무슨 말을 하려고?"
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날 많이 무서웠니?"
문 안쪽이 조용해졌다. 오래 침묵하다 아이가 말했다.
"그날? 어느 날?"
"병원 유리문 앞에 있던 날. 네가 기다리기 시작한 날."
"응."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불이 꺼져서 무서웠어. 엄마는 문 너머에 있었고, 옆에 있던 애가 내 손을 잡았어. 나는 뛰어갈 수 있었는데 걔가 넘어져서 못 갔어."
나는 사진 속 어린 내가 손목을 꼭 붙들던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그동안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말은 달랐다.
"그 애는 다쳤니?"
"몰라. 무릎이 아팠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기다렸어."
순간 그림이 바뀌었다. 어린 나는 혼자 못 움직인 게 아니라 친구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아이도 나를 기다리려 한 것일 수 있었다. 누가 먼저 누구를 구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서로를 기다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뒤에는?"
"어른들이 하나만 먼저 나오라고 했어. 그러다가 시간이 멈췄어. 누가 계속 서류를 들이밀어서 하나 고르라고 했어. 난 고르기 싫었어."
"고르지 않아도 돼. 이제 그 말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아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나를 기다리던 그 애는 어떻게 돼?"
"지금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다만 그때의 네가 겪은 일이 그 사람한테 마음대로 넘어가지는 않게 할 거야."
"그 사람은 나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 너머의 아이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목소리만으로 대답했다.
"내가 대신 정할 수 없어. 너와 그 사람 모두에게 물어봐야 해."
아이의 손이 문 아래로 나타났다. 손바닥 위에 작은 종이 접기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노란색 배였다. 병원 영수증을 접어 만든 것이었다.
"그 애가 접어 줬어."
나는 종이배를 들지 않았다.
"내가 봐도 될까?"
"응. 그런데 가져가진 마."
"알겠어."
아이의 손바닥에서 노란 배를 바라봤다. 종이에 약국 도장이 찍혀 있었고, 한쪽 끝에는 어린아이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있었다.
'시우랑 같이 집에 가기.'
갑자기 숨이 막혔다. 어린 내가 썼을지도 모르는 문장이었다. 이제까지 내 수첩에는 원본을 되찾겠다는 결심이나 실종자를 구조하겠다는 목표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십팔 년 전의 나는 그저 친구와 같이 집에 가고 싶었다.
"시우야."
내 입에서 이름이 나가자 아이가 움찔했다. 나는 급히 덧붙였다.
"미안해. 네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면 부르지 않을게."
"아냐."
아이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오늘은 괜찮아. 네가 내 말을 먼저 들었으니까."
문 위에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0번 보관실 미귀환 주체: 호명 허용 범위 변경.]
그 아래 새로운 질문이 떴다.
[현재 살아가는 한시우와의 대면을 원합니까?]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아이에게 문장을 읽어 줬다. 아이는 오래 생각하다 말했다.
"궁금해. 하지만 먼저 그 사람도 나를 만나고 싶은지 물어봐 줘."
나는 잠깐 문앞 바닥을 쓸었다. 누가 버리고 간 포장지 한 장이 구석에 붙어 있었다. 정지 세계에서도 더러운 건 더러웠고, 치울 일은 남았다. 아이가 언젠가 밖으로 나온다면 첫 발을 내딛는 곳만큼은 깨끗했으면 했다. 유나는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다 말없이 다른 쪽을 정리했다.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드라마처럼 크고 위험한 순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작은 준비가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는 그 대답을 수첩에 적었다. 가장 기쁜 대답은 '당장 문을 열어'가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억지로 다가가지 않겠다는 어린아이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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