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46화
PAYLUA ORIGINAL · 제46화

46화. 아버지가 만든 거부 버튼

퇴근하면 시간이 멈춥니다 · 5,060자

오프라인 책장
구태형이 내일 여섯 시에 혼자 오라고 했다. 나는 그 메시지를 읽은 뒤 노트북을 덮었다. 혼자 오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온다는 건 상대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여섯 번 기억을 잃는 동안 그가 배운 건 나를 설득하는 방법이 아니라 고립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안 갈 겁니다." 내가 말했다. 유나가 안도한 얼굴을 했다. "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뛰어갔어." "전에는 제가 어땠는지 모르니까요. 이번엔 어제 받은 수첩부터 보겠습니다." 기혁 형사는 영상에 현재 삽입된 음성을 별도로 추출해 보존했다. 원본 파일의 해시와 변조된 파일의 해시가 달랐다. 강문석은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삽입 음성은 1998년 원본에 섞여 저장된 것이 아니라, 재생할 때만 올라오는 중첩 신호였다. 내가 화면을 닫으면 사라졌다가 다음에 열면 다시 나타났다. "실제 원본을 바꾸지 못한다는 뜻이군요." 내가 물었다. "지금까지는 그래요. 구태형에게는 화면을 조작할 권한이 있지만 원본 관측 로그를 직접 바꿀 권한은 없어요." "그러면 증거를 분리해서 보기만 해도 되는 거네요."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화면에 나온 걸 원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는 값이 그대로인데 관리자 화면에 잘못된 숫자가 표시돼 운영 회의가 엉망이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데이터가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번에는 훨씬 잔인한 결과가 따랐지만, 화면과 실제 기록을 구분하는 일은 똑같이 중요했다. 서아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날 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서명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다만 인계 대상의 범위는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도겸, 나를 찾지 마. 내 위치를 아는 사람이 늘수록 그들이 그걸 이용할 수 있어. 대신 내가 제출할 자료를 받아 줘."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 다만 내 기억 속에 없는 계약서가 나타나서 조금 무섭네." 그녀가 침묵하자 나는 말했다. "무섭다는 말, 하셔도 됩니다. 저도 맨날 무섭거든요." "알아. 그런데 그걸 안 무서운 척하는 네가 더 걱정됐어." 나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녀도 끊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오래된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편했다. 현재의 대화를 기억하고 기록하면 충분했다. 새벽 두 시가 지났을 무렵 강문석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그가 확보한 검증 장치의 외부 연결 시도가 짧은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정지 시간도 아닌데 누군가 장치의 관리 화면을 열려고 한 것이다. "물리적으로 분리한 장치 아니었습니까?" "원본은 분리했습니다. 문제는 보관국이 장치의 복제본이 있는 장소를 아는 것 같습니다. 외부 신호를 보내서 어떤 키가 응답하는지 확인하고 있어요." 나는 잠깐 회사에서 장애 대응하던 때를 떠올렸다. 인증 요청을 수백 번 반복하는 프로그램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한 요청 하나하나가 사람의 이름과 연결돼 있었다. 악의적인 요청을 곧바로 지워 버리면 그 사람이 무엇을 시도했는지 설명할 증거도 사라진다. "복제본은 그대로 두고 응답만 끊으세요. 저쪽에 성공했다고 보이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실패 이력도 남길까요?" "네. 언제 어떤 키로 접속하려 했는지, 개인정보를 가리지 않고 들여다본 사람은 없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강문석은 잠시 뒤 장치가 완전히 고립됐다고 전했다. 우리는 긴 대화를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연결이 늘어나면 정지 세계에서 누가 무엇을 요청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 나는 수첩에 '읽기는 가능하지만 수정은 불가'라고 적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너무 답답했다. 악당을 찾았으면 곧바로 시스템을 닫아 버리면 될 텐데, 왜 이렇게 확인하고 보존해야 하는지. 그러나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료를 보존하는 과정과 악당이 사람을 가두기 위해 자료를 보존하는 과정은 비슷한 화면을 사용할 수 있었다. 차이는 데이터를 누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느냐에 있었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 새벽 다섯 시에 깼다. 꿈에서 아버지는 어린 내게 복도 끝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무슨 문이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꿈을 깨고 보니 아버지의 얼굴은 또렷하지 않았다. 나는 꿈에서 본 얼굴을 아버지의 실제 얼굴이라고 적지 않았다. 수첩에는 단지 '오늘 새벽 꿈. 진짜 기억인지 알 수 없음'이라고 남겼다. 어머니에게서 아침 문자가 왔다. '어제 온 친구분이 혹시 또 오시나요? 빈 접시가 계속 보여서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 '언젠가 같이 올 수도 있어요. 아직 약속할 수는 없어요'라고 답했다. 빈 접시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채워야 하는 건 아니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기에, 아버지가 기증한 물건을 찾았다는 연락이 더욱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드디어 답이 오겠지 하고 달려들면 또다시 누군가의 말을 내 마음대로 완성하게 될지도 몰랐다. 기록사가 확보한 목록을 보내 주자 나는 내용보다 먼저 그 물건이 지금 누구의 소유이고, 누가 읽을 권한을 갖는지 확인했다. 다음 날 오후, 병원 재단에서 아버지 차정수가 기증한 오래된 전자수첩을 확인했다는 연락이 왔다. 정식 보존 절차를 거쳐 남아 있던 기증품이었다. 형사가 원본 소재를 확인한 뒤 그 안의 개인 정보는 분리하고, 사고 경위에 직접 관계된 데이터만 열람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전자수첩은 손바닥만 했다. 충전 단자가 부식돼 바로 켜지지 않았지만, 안쪽 저장장치에는 읽을 수 있는 데이터 일부가 남아 있었다. 강문석은 임의로 장치를 뜯어 복구하지 않았다. 기록사의 참관 아래 보존용 복제본을 만들고 원본을 봉인했다. 내가 처음 본 건 프로그램 이름이었다. 'WAIT_0' 그 아래 아버지가 직접 쓴 설명이 있었다. '사람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의 시간을 보관할 수 있는가.' 이름을 보자 낯익은 감각이 올라왔다. 개발자에게는 누구나 버리지 못한 테스트 프로그램이 하나쯤 있다. 아버지도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만든 것은 테스트 코드가 아니었다. 사람이 선택을 강요받을 때 잠깐 숨을 고를 수 있게 해 주는 틈이었다. 강문석이 장치 설명을 읽었다. "관측만 가능. 당사자의 직접 선택이 확인되면 원래 시간에 복귀. 대리 승인 불가." "마지막 줄이 아까 본 빨간 펜 글씨와 반대네요." "그렇죠. 처음에는 누가 대신 결정할 수 없는 구조였어요." 우리는 화면 아래에서 작은 버튼 하나를 발견했다. [거부] 디자인도 없는 회색 글자였다. 누르면 무엇을 거부하는지 설명이 붙어 있었다. '관리자가 제시한 귀환 조건을 거부하고 원래 보관 상태를 유지한다. 유효 기간 없음. 언제든 다시 선택 가능.' 내가 숨을 내쉬었다. "이 기능이 왜 지금까지 안 보였던 거죠?" "구태형이 인터페이스에서 숨겼을 겁니다. 없앤 게 아니고. 삭제하면 과거 기록과 충돌하니까요." "그러면 아이가 영원히 갇혀 있는 걸 선택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죠. 지금 강요된 조건을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거부하고 기다릴 권리도 있어야 자유로운 선택이 됩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혼자 세상으로 나오거나 다른 사람을 지우거나, 구태형이 내밀던 두 가지 선택지와 달랐다. 세 번째 버튼은 거절이었다. 그 버튼 하나로 아이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가 원하지 않는 출구를 열려고 문을 부수지 않아도 된다. 장치 안쪽의 다른 폴더에는 사고 뒤 아버지가 매일 기록한 짧은 점검 일지가 있었다. 처음 며칠은 시간과 날씨만 적혀 있었다. '맑음, 아이 둘 식사함.' '비, 밤에 둘 다 악몽.' '흐림, 현관문 확인.' 나는 기록을 읽다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두 아이가 같이 밥을 먹었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건 이상했다. 문 안에 아이가 남았다면 어떻게 같이 밥을 먹었을까. 그 문구가 기록된 날짜는 사고 뒤 사흘째였다. 나는 강문석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두 아이를 보셨다고 했어요. 문 안에 있는 아이와 밖에 있는 아이를 번갈아 본 걸까요?" "가능성은 있어요. 아니면 어린아이의 기억이 특정 시간에만 겹쳐져 나온 것일 수도 있고요. 여기서 확정할 수 있는 건 그날 두 사람에게 식사를 준비했다고 기록했다는 사실뿐입니다." 나는 문장 옆에 물음표를 그렸다. 아버지가 거짓말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광경을 일상적인 말로 적어 둔 것 같았다. 식사 여부를 먼저 적은 사람이라면 아이들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일지의 마지막 며칠에는 글씨가 급하게 바뀌었다. '같이 나가야 한다. 한 명을 선택하라고 하면 안 된다.' 같은 문장이 세 번씩 적혔다. 아버지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훗날 사람들이 다시 겪지 않도록 남기려 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나는 그 문장들을 가슴속에 새겼다. 아버지의 수첩 마지막에는 짧은 음성 파일이 있었다. "이걸 열어 볼 사람이 누구일지는 모르겠다.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기록한다. 두 아이 모두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시간을 대신 가져간 게 아니다. 누가 그런 설명을 하면 반드시 의심해라. 처음부터 둘의 시간은 각자의 것이었다."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리고 혜정아. 내가 그날 문을 하나밖에 못 만든 게 아니라, 두 번째 문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던 거야. 네가 끝까지 다른 방법을 물어 줘서 고맙다." 나는 전자수첩을 보며 오래 앉아 있었다. 기억 속 아버지의 마지막 악수는 사라졌지만, 그가 그날 어떤 말을 남겼는지는 들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아쉬웠다. 그래도 빼앗긴 기억을 돌려받기 위해 타인의 시간을 내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오래된 화면 아래에 새 문자열이 떠올랐다. 'WAIT_0 검증 키 위치: 현관문 손잡이 뒤.' 어머니 집의 현관문이었다. 나는 즉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일단 어머니께 연락했다. 그분의 물건이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문 뒤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당신이 아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같이 봅시다. 문은 내가 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잃은 어머니에게도 아직 집의 주인은 어머니 자신이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46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4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